들어는 보았나? '마감증후군'

글을 쓴다는 건 언제나 고통스럽고 부담스럽습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언제나 이 모양입니다. 체질적으로 저는 유독 ‘마감병'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마감 때만 되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달거리(?)하는 여자처럼 꼬박꼬박 장염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니까요.

가령 이런 식입니다. 어떤 원고든 마감이 코앞에 다가오면 모든 일에 건성이고 집중하지 못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저것 자료를 뒤진다거나 취재수첩을 뒤적거리지만 정작 본격적인 ‘슈팅'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이때가 주말이면 더욱 가관입니다. 일단 딱 잠 한숨 자고난 뒤 밤샘공부 하겠다며 공수표부터 날리는 ‘베짱이 타입' 의 수험생마냥 원고는 뒷전이고 소파에 드러누워 5초 간격으로 리모컨만 눌러댑니다. 그렇다고 딱히 관심 있게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손 하나 까딱 않은 채 아내에게 과일 달라, 커피 달라 귀찮게 굽니다.

“또 시작이군.” 불평 가득한 아내는 숫제 역병 환자 보듯합니다. “관상을 보아하니 오늘도 마감하기 그른 거 같으니 애저녁에 손털고 애들하고 놀이동산에나 다녀오는 게 어때? 뒹굴뒹굴 빈둥빈둥 소파 다림질이나 할 게 뻔한데 바람이라도 쏘이는 게 원고 쓰는 데 한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전 그렇지 않다고 항변합니다. 왜냐면  워밍업 중이니까요. 마누라 눈에는 원고 한 줄 쓰지 않고 헛되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런 마감병은 어디까지나 좋은 원고를 쓰기 위한 산고(産苦)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인정머리 없는 아내와 아이들은 중병(?) 걸린 가장만 달랑 남겨둔 채 허물벗는 뱀처럼 저희끼리 쏙 빠져나갑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에 정신을 수습합니다. TV수상기는 저 혼자 깔깔대고 있고 창밖은 어둑어둑합니다. 현관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여섯 개의 시선이 표창처럼 날아와 꽂힙니다. 질질 입가에 번진 침자국과 한껏 새둥우리를 친 가장의 몰골을 그들은 결코 산고를 겪고 있는 산모로 인정할 수 없었을 테지요.

내가 발가락으로 써도 당신보다 훨씬 더 빠르게 쓰겠군. 얼어죽을 핑계는~

마감병 증세가 이것으로 끝난다면 오죽이나 좋을까요. 잠은 잠을 부르는 미약 성분이 있나 봅니다. 낮잠을 잔 날은 신체 사이클이 무너져서인지 몸이 더 찌뿌드드합니다. 제 때를 맞춰 먹지도 않았으니 속도 거북합니다. 자연 정신이 맑지 않으니 ‘결전의 때'로 잡은 야밤이 되었음에도 글빨이 설 리 없습니다. 부득이 작전상 총공격의 시점을 이른 새벽으로 일시 늦추고 다시 소파에 누워 노숙자처럼 잠깐의 칼잠을 청합니다. 정말이지 잠깐만이라고 다짐하며… 깊은 잠이 들까봐 침대에서 발뻗고 자지도 못합니다. 집안의 전등이란 전등은 다 켜놓은 채입니다. 어디까지나 맑은 정신을 갖추려 딱 한두 시간만 휴식을 취할 거니까요.

악몽의 연속입니다. 수학시험에 백지를 내는 꿈을 반복해서 꿉니다(학창시절 수학에 대한 제 공포가 오죽했으면 수학을 전공한 여자와 결혼을 다 했겠습니까. 믿거나 말거나. ^^;;).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면서… 꿈결에서도 마감만은 지켜야 한다는 투철한 직업의식이 발동하고, 실제 일어나 열심히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기도 하는데…, 이런이런 내가 내 모습을 본다? 흑흑, 이것조차 꿈인 그런 뻘밭을 허우적대다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면 언제나 창밖은 둥근해가 뜬 아침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폼으로 아내가 뼈아프게 한 초식 날립니다.
“워밍업 한번 참 길다아~! 두 번만 길었다간 퓰리처상 타것네.”

그런데 희한하죠. 바로 그때부터 신들린 듯 원고가 좍좍 나갑니다. 시간상 불가능할 거 같은 마감이 언제나 이런 식으로 지켜집니다. 아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찹니다. “작심하고 쓰면 금세 할 걸 왜 매번 사서 고생이야?” 그러면 저는 또 이렇게 우깁니다.
“우씨~, 당신은 전희(前戱)도 몰라? 이게 다 워밍업이 되었기 때문인 거야. 게을러 그런 게 아니라고!”

'꼰대기자'가 자원등판한 신예 유망주 탐구기사, 新기사론

2002년 초 정확히 14년간 몸담았던 [월간바둑]을 그만둔 뒤 만감이 교차했지만 아내가 좋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면 바로 남편의 이 마감 증후군에 주기적으로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돌고 도는 게 세상일이라고, 어쩌다 보니 사이버오로에서 다시 [월간바둑]  팀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아내의 스트레스도 다시 하나 추가되었습니다.  

‘新기사론'은 편집회의에서 제가 자원등판한 칼럼입니다. 입사 3년 만인 갓 서른에 편집장에 오르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취재기자로서 일선 현장을 맘껏 누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데스크란 것이 어찌보면 ‘뒷방꼰대' 같은 자리여서 기사(記事)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족쇄일 수도 있습니다. 일벌(일선 기자)들이 열심히 따오는 꿀을 받아먹으며 평생 토굴에 들어앉은 채 맑은 공기, 따뜻한 햇볕을 느끼지 못하고 알만 낳는 여왕벌의 신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인터넷 업계로 말을 갈아 탄 뒤로도 제 처지는 크게 다를 것이 없어 ‘필드'를 향한 열망만큼은 여전했습니다. 더군다나 ‘송아지 삼총사' 이후의 신세대 기사들에 대해서는 얼굴조차 모르는 기사가 많아 명색이 바둑글을 쓰는 작자가 이래도 되는가, 하는 자성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인 유망주들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우리 바둑의 내일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송아지 삼총사' 이후 각광받고 있는 신인 기사들을 제대로 소개한 글이 거의 없어 아쉬움이 컸습니다.

덜컥 욕심을 부리긴 하였으나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좀 부풀리면 거의 자식뻘 되는 어린 기사들과의 인터뷰가 어색하지는 않을까. 말은 통할까. 그러나 이것은 ‘꼰대 세대'의 기우였습니다. 어쩌면 하나같이 늠름하고 말도 잘하고 그리 잘 생겼을까요. 조남철 선생을 운구하던 젊은 기사들을 보면서 최규병 9단이 했던 말, “우리 후배들 정말 잘 생겼죠?” 큰별을 떠나보내던 바로 그날 미래에 그 자리를 메울 샛별들을 흐믓하게 바라보던 그 눈길로 절로 바라보게 되더군요. 이들과의 데이트는 참말 즐거운 시간입니다. 

샛별들과의 만남은 의도적으로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5층 연구생실로 잡습니다. 5층이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엄밀히 말하면 옥상에 지은 옥탑방입니다. 이곳에는 두 개의 연구생실이 있는데 인터뷰는 그중 15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대부분 합니다. 이 방은 연구생 최상위 1~3조 36명이 리그를 치르는 현장이니 감회가 새로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생시절이 가장 치열하게 공부할 때라고 하는데,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자신의 불투명한 운명 앞에 불안에 떨며 망아지 같이 큰 눈망울을 꿈벅거리던 모습을 상상하며 이제 전도양양한 유망주로 떠오른 그들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것도 자잘한 즐거움입니다.

[월간바둑]에 2007년 8월호부터 ‘新기사론'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예의 저 마감증후군과 ‘지면 부족'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할당받은 10페이지로 소화하기에는 ‘新기사'들의 이야기가 차고 넘쳐 매번 써놓은 원고를 가지치기하는 일로 더 씨름하였습니다. 골자는 다 넣었다고는 하나 이러한 ‘지면 사정'으로 잡지에는 한 60~70%쯤 소화했을까요. 다행이 인터넷 연재에는 이러한 제약이 없으니 소개하고 싶은 바를 다 펼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게다가 잡지와 제법 시차를 두고 올리는 글이라 최근 데이터와 뉴스로 첨삭, 재구성할 수밖에 없으니 어찌보면 새로 쓰는 거나 다름없다 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新기사론' 집필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 특히 취재에 응해 주신 프로기사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