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산 무상입네다."

얼굴에 커다란 칼자국이 난 사내가 큰절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켜서자 마지막으로 왜소하고 얼굴이 곱상한 사내가 서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박구라 합니다."

"오, 그렇소? 말투가 곱구료?"

김려가 투박한 북관 사투리 일색인 사람들 속에 근기(경기)지방 말투를 쓰는 사내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양천봉이 끼어 들었다.

"형님, 저 친구가 '한국기'의 제자입니다. 한국기 아시지요?"

"한국기라면...김한흥을 말하시나?"

양천봉이 한국기(韓國碁)를 말했다. '국기'란 '국수'의 다른 말로 한나라에서 바둑의 최고수를 말한다.

"아이고 형님, 한국기에 대면 김한흥은 하수지요. 한수대 말입니다."

"오?  한수대?  저 사람이 한수대의 제자란 말인가?"

"그렇다니까요. 한양 도박장에서 사고를 친 후 포청 수배를 받고 도망다닌 것을 제가 거두고 있는 중입니다."

양천봉이 신명을 내며 말했다.

"오? 이리 오시게. 내가 한국기를 평소 흠모했거늘...북관땅에서 그의 제자를 만나다니 믿기지 않는군. 자 이리 오시게?"

김려가 박구(朴球)에게 옆자리를 내어주며 말했다. 박구가 김려의 행동에 멈칫하며 좌우의 눈치를 살폈다.

"뭐하는 게야? 형님이 올라오라 하잖아?"

양천봉이 손을 흔들며 소리를 쳤다. 그때서야 이십여 명의 사내들의 통성명이 모두 끝났다. 그때 방문 하나가 열리며 서너 명의 기녀들이 청을 뽑았다. 뒷편에는 장고와 북 가야금으로 구성된 악단이 앉아 기녀들의 노래에 장단을 치고 있었다.

지화자

지화자

지화 좋구나

북관 부령땅

묻네

묻네

사내들 평안호(平安乎)

"북관에 한양사람은 나 혼자인 줄  알았더니  동향인이 또 한 사람 있었네 그려?"

김려는 앉아있는 박구의 손을 잡고 말했다. 북관에서 한양사람을 만난 자체가  반가웠고 거기다가 그가 바둑인이라는 것이 더욱 반가웠다. 박구가 한수대의 제자를 자처한다면 바둑 기력 또한 상당할 터였다.

조선시대 바둑이 가장 성행하고 고수들이 가장 많던 때가 영조 때이다. 조희룡의 눈에 포착된 고수 김종귀나 김한흥 고동 이학술 등이 다 이 시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과 처지가 다른 또 한 사람의 고수가 있다. 그 자가 바로 한수대다. 한수대는 여항의 고수들과는 격이 다르다. 그는 승정원일기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꾀어 차고 있다.

실록 속에 등장하는 조선의 고수들 중 숙종조의 장문익과 더불어 최고의 고수 중의 한명이 바로 한수대인 것이다. 아래의 기록은 승정원일기로 영조7년 4월 1일의 기록이다. 조선실록 속에는 나오지 않는 얘기다.

이 기록은 청국에 동지사절단으로 다녀온 정사 서평군 효와 부사 윤혜교, 승지 이광보 등이 영조를 친견하고 사절단으로 다녀온 사연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영조와 여러 의견을 나누는 장면이다. 승정원일기는 실록의 3배 분량의 방대한 양이나 아직 번역 작업이 10%도 되지 않았고 이 대목도 번역을 기다리고 있는 대목 중의 하나다.

김려는 이날 한수대의 제자인 박구를 부령에서 만난다. 그동안 지루하게 전개되던 바둑에피소드가 드디어 낱줄을 풀어주는 동력을 만난 것이다.

------------------------------------------------------

橈又曰, 與留保輩, 頻頻往來, 甚爲非便, 故托以爲見朝鮮碁爲言, 連爲往來, 而韓壽大, 碁局善手, 故每與是瑜相往矣。 上曰, 善碁韓壽大何許人耶? 橈曰, 臣之帶去軍官矣。 橈又謂是瑜曰, 留大人, 皇上信任之臣也。 後當大用, 汝若誠心相交, 則必有益於國事矣.

-승정원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