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의 침묵은 오래간다. 한번 바둑판을 응시하기 시작하면 두세 시간은 기본인 아이다. 김산은 물 한컵을 떠다 도인의 옆에 놓고 나와 자신의 책상 앞에 앉는다. 붉은 벽돌이 달빛을 받아 검게 보인다. 시간은 새벽 두시를 넘고 있다.

붉은 벽돌을 네 귀퉁이에 쌓아놓고 두텁고 넓은 나무판을 올려놓은 김산의 책상 옆에는 언제나 바둑판 하나가 덩그런하다. 그것으로 누군가와 바둑 두어본 지 까마득하지만 19로의 격선(格線)은 전등빛을 반사하며 침묵하고 있다. 책상 위에는 인류가 출현한 후 가장 오래된 책 중의 하나인 사서(史書)가 놓여 있다.

김산의 직업은 책읽기다. 그는 독서가 아니면 오두막히 창으로 보이는 앞산을 몇 시간이고 바라본다. 독서와 생각은 김산을 살게 하는 힘이다. 김산은 그 시간을 통해 역사와  만난다. 역사는  과묵(寡默)과 낡은 옷으로 골동품에 다름 아니지만 그는 역사와 문언문(文言文)으로 대화하며 하루 또 하루를 보낸다.  

하루는 시간(時間)이다. 시간은 때의 사이, 때의 공간에 줄을 그어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낡고 초라한 김산의 방에서도 생성하고 소멸한다.

역사는 시간을 말하는 학문이다. 역사는 시간을 빌려 몸을 의탁하고 달리는 시간의 불청객들인 인간에게 시간의 모습과 의미와 무의미(無意味)를 함께 보여준다. 시간은 무정하다. 역사는 문자로 된 책이다. 역사는 문자를 통해 시간의 색감과 느낌을 전해준다. 역사는 '주역'의 원형이기도 하다. 역(易)은 말로 행위를 다 말할 수 없고 문자로 사실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書不盡言言不盡事)했다. 그 말은 주역 스스로 만능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가 그렇다.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바둑이다. 바둑은 역사가 만들어질 당시의 고대사에도 있었다. 역사는 삶의 총체다. 삶은 언제나 세계 속에서 부조화하다. 개인적 삶이 공동체의 삶 속에서 부조화하지 않다면 그거야 말로 문제일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인간은 세계와 늘상 충돌하고 불화한다. 인간이 존재라면 시간은 존재와 세계를 끌어안고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다스린다. 시간은 시대라는 편리한 장막으로 이것들을 한곳에 가두기도 하고 풀어 놓기도 한다.

시대(時代)란 장막은 기실 시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땅에 그어 놓은 금에 불과하지만 시간을 살고 있는 인간들은 마음의 금이라도 그어놓아야 편안함을 느낀다. 시간은 없는 것이기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기필코 표현하겠다는 문자는 재현과 재구성으로 나타난다. 문학으로 재현하고 역사로 재구성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말하듯 존재가 시간 속에서 했던 일을 재현하고 재구성한다는 것은 실현불가다. 존재를 복제할 수 없듯 존재의 일상을 재현할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역사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층층만별한 이유가 그것이다. 김산은 담배 한대를 다 피운 후 나머지 메일 한통을 더 확인한다.

-안녕하신지요.

선생의 존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옛날 특히 바둑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정조임금의 바둑판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릴까 합니다.

시간과 장소를 선생께서 정해주시면 한번 모시고 십습니다.

홍두인(洪頭人).

"홍두인?"

김산은 메일을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고 온몸이 얼어 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방안이 싸늘할 정도로 기온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