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졸들은 방안을 이사가는 집의 안방처럼 만들어 놓았다. 불온한 기록을 기찰한다는 핑계로 이불보를 모두 뜯어 놓는 등 목불인견의 행태를 자행했다. 군졸들은 김명세의 서슬에 눌려 야차처럼 굴었다.

"흐, 이거 뭐라카이? 바둑판 아니지비?"

"그건...."

"유배를 온 죄인이 바둑으로 신선유람을 한다이? 이기 이바구니 싸래기니..."

김명세가 보자기에 싸 놓았던 바둑판을 보고 군졸들에게 압수를 지시했다. 핑계가 가관이었다. 유배객에게 바둑판이 어울리냐는 것이었다.

"안된다. 그건 상감께옵서..."

김려가 바둑판을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소리를 쳤다. 상감이란 말에 김명세도 순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뭐라카니? 머라고 씨부린 게니? 다시 해봐라카이?"

김명세가 김려의 뒷허리춤을 잡고 말했다.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김명세는 지역 관장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일개 군뢰의 신분으로 김려 같은 양반 유배객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 바둑판에는 상감의 어필이 들어 있다. 한번 마음대로 해보거라 이놈들? 니놈들의 목이 열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이바구를까지비? 뭐..."

김명세는 기세를 누그러트리지 않으면서도 바둑판을 뺏았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군왕의 어필을 찢는다거나 망실시켰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단죄되기 십상인 세상에서 자연스런 행동일 것이다.

"니놈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러는지는 모르나, 나는 언제라도 상소를 올릴 수 있는 사대부다. 내 비록 죄인이나 상감의 어필을 짓밟는 행동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야."

김려는 조금 주춤하는 김명세를 몰아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눈치 빠른 김명세가 억지를 쓸 수는 없었다.

"역도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못 챙겼다카이? 알았다카이. 바둑판만 제외하고 모조리 밖으로 끌어내 조근조근 밟으라카이? 니놈은 구석에 찌르러져 있음둥?"

김명세의 지시를 받은 군졸들이 방안의 모든 물품을 마당으로 끌어내어 샅샅히 수색을 했다. 마당에는 포도송이 같은 눈송이가 내렸고 기온은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놈들이?"

"아, 화낼 거 없다이. 유배객 검색은 관의 업무 아니겐니? 흐흐. 자 돌아들 가자카이."

김명세가 군졸들을 대동하고 집을 나갔다. 김려는 마루 위에 털석 주저 앉았다. 그때 위서방이 돌아왔다.

"나으리?"

"오, 위서방인가?"

"나으리 이건 또 뭔일입니까요? 아이고 이런..."

위서방은 마당 위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 있는 세간들을 하나씩 들고 눈을 털며 억울함을 표시했다.

"그놈은 천하에 쳐 죽일 놈입니다요.  그리고 양기위께서는 저녁에 오실겁니다. 천영루 여주인에게 서찰을 맡겼습니다."

"여주인에게 말인가?"

"연옥이라고 행수기생이었는데 사정 얘기를 듣고는 걱정말라 하셨습니다. 서찰을 꼭 전해주겠다 하면서요."

위서방이 손과 발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김려는 천영루 주인이 '연옥'이라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연옥은 북관기생으로 김려는 그녀를 중국의 여인 '왕소군'보다도 시를 잘 쓰는 여자라 평가한 바 있다.

 "나으리 진지 드셔야지요."

위서방은 방을 대충 정리를 한 후 부엌에 들어가 작은 솥에 좁쌀과 시래기를 넣고 죽을 끓여 왔다. 한양에서 가져온 약간의 돈과 박제가가 준 어음이 있었으나 김명세의 등쌀에 꺼내어 쓸 엄두를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드세요?"

"자네도 들게나..."

김려가 까칠거리는 죽을 한입 입안에 넣자 지긋지긋한 김명세가 또 다시 등장했다. 이번에는 좌수까지 함께였다. 아마도 군왕이 써준 친필 바둑판 때문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