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

2007년의 마지막 날 오후, 회원 여러분께 ‘송구영신(送舊迎新)’의 편지 한 장이라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늘 북적대던 사무실에 홀로 앉아 여기저기 빈 자리를 쳐다보니 기분이 묘해집니다. 고립의 외로움과 은밀한 자유로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며 홈페이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한국바둑리그 기사 중 영상뉴스에 눈길이 닿았습니다.

영남일보 이정환 팀장이 이런 메시지를 남겼네요.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다

그 아래 붙인 최규병 감독의 대구(對句)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오는 길도 없고 가는 길도 없고 그냥 그렇게 갑니다

이정환 팀장은 고전(古典)에 밝은 분입니다. ‘금강경(金剛經)’ 한 구절 끌어다 쓰는 것쯤이야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겠죠. 그런데 최규병 감독의 대구에는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의식의 발현 또한 바로 그 사람의 ‘영감(靈感)’에 의한 것이니까요.

즉흥적인 자리에서 바둑의 본질을 담은 ‘길’과 ‘간다’는 표현을 쉽게 끌어냈다는 것은 평소 바둑에 대한 마음가짐이 어떠한가를 알게 해줍니다. ‘오는 길’과 ‘가는 길’로 ‘과거’와 ‘현재’를 비유한 것도 그럴 듯하지만 ‘그냥 그렇게 갑니다’라는 말로 풀어놓은 미래는 정말 절묘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 안에서 ‘불안한 미래를 긍정의 마음으로 열어가는 길’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보내며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그 직, 간접적 체험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절박한 무엇인가를 심어줍니다. 그런 감정들이, 2007년의 마지막 날을 앞둔 휴일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또는 하지 않았던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출한 소년처럼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니다가 하나님과 악수하는 기분으로 자선냄비에 지폐 몇 장을 넣었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로또를 두 장 구입한 것도 사소하지만 새로운 일이었죠. 이 녀석들의 역할은 당첨발표를 확인하는 며칠간 주머니난로처럼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정도로 충분하겠지요. 

늦은 밤에는 오랫동안 이유 없이 발길을 끊었던 광화문 골목의 작은 식당을 찾았습니다. 비계가 두툼하게 붙은 돼지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시켜놓고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마주앉아 씩, 웃는 친구의 얼굴을 봅니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마, 녀석의 두 눈에 비친 제 얼굴도 꼭 그럴 겁니다.

결코 불편한 자리가 아니었는데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공유할 수 있는 말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지요. 그러나 ‘솔직한 말’은 그런 환경도 시간의 거리도 순식간에 지워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요.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 깜빡, 졸았습니다. 이 모습이 오래전 제가 전철 안에서 보았던 아저씨들의 그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오는군요. 저도 어느새 대한민국의 ‘보통 아저씨’가 됐나봅니다.

휴대폰에 답신이 밀려듭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평소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밀린 빨래하듯 가벼운 인사의 메시지를 보냈는데 과분한 화답이 쏟아집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메시지 대신 직접 전화를 주셨습니다.

기뻤습니다. 평소에는 문자메시지를 상당히 싫어했는데(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스팸 메일’ 탓일 겁니다) 마음을 바꿔보았더니 이런 대박(?)이 터지는군요. 하기 싫은 일도 해보니까 잊고 살았던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는 것, 누구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인사를 건네야겠습니다. 물론, 하나하나 진심을 담아서요.

눈 덮인 들판의 꿈처럼

바둑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가장 고마운 것은 살아가면서 ‘균형’과 ‘조화’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오청원 선생(오늘은 어쩐지 우칭위안이라는 표기를 따르고 싶지 않네요)의 ‘바둑은 조화’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이 버릇은 저에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안겨주었습니다.

2007년 내내 마음을 괴롭힌 일도 되돌아보니 ‘균형’과 ‘조화’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서로 마음을 트는 이해의 길이 막히면 곧 불신의 벽이 생기고 그 아래 음습한 그늘에서는 오해와 증오의 독버섯이 자라납니다.

하루 전 많은 사람들의 메시지를 받으며 이제는 마음속의 그늘을 걷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움은 상대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의 가슴에 더 큰 흉터를 남긴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어야 했습니다.

한 판의 바둑을 생각합니다. 포석을 구상하고 여러 정석진행을 거쳐 중반을 넘어서고 우여곡절 끝에 종반을 맞습니다. 요즘은 마무리에서 승부가 나는 경우가 많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정보를 쉽게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일까요. 우리의 삶도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대국이 끝나면 복기를 합니다. 승자보다 패자에게 더 소중한 시간입니다. 성공의 기쁨보다는 실패의 되새김이 미래에 더 값진 자산이 될 것이 때문이지요. 우리의 삶도 그럴 것입니다. 한번의 성공으로 교만해져서도 안 되고 한번의 실패로 절망할 필요도 없겠지요.

복기를 마치고 돌을 거둔 뒤 텅 빈 바둑판을 봅니다. 언젠가 ‘대국이 끝난 바둑판은 추수를 끝낸 빈 들판과 같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빈 들판에 눈이 내리고 눈 덮인 들판은 겨우내 꿈을 꿉니다. 푸른 봄바람과 한여름의 소나기 그리고 가을의 다사로운 햇살이 그 안에서 익어갑니다.

한판의 바둑도 우리의 삶도 그와 같습니다. 다시 시작되는 바둑의 첫 수, 다시 시작하는 일의 첫 걸음은 처음의 마음을 닮되 처음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눈 덮인 들판의 꿈처럼 좀더 많은 사유(思惟)가 담겨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시작되는 첫 해, 무자년(戊子年)을 맞아 사이버오로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올 한해는 모두모두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