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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박사학위 취득한 정수현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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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 그는 바둑 전문가다. 바둑을 업으로 하는 전문기사(專門棋士)로서 97년에 토너먼트프로 최고의 단위(段位)인 입신(入神: 9단의 별칭)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명지대학교의 요청으로 세계최초로 신설된 바둑학과를 맡아 현재까지 전임교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러고 보면 동료들이 바둑학과 설립 이전부터 그를 ‘반상(盤上)의 교수’라고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토너먼트프로이기도 하고 대학교수이기도 한 그는 바둑 전문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희소가치를 가진 사람인데 그런 그가 최근 더욱 희귀한 존재가 됐다. 어느 정도 희귀한가. 바둑의 발상지를 주장하며 바둑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시도한 중국에도 없고 16세기부터 제도권의 지원으로 전문기사를 육성하며 ‘현대바둑의 메카’로 자부해온 일본에도 없다.
정수현 이전에는 오직 한 사람, 한국의 문용직 5단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하나도 어려운 두 갈래 길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일은 목소리 높여 자랑해도 좋을 영예다. 그는 한국바둑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유이무삼(?)한 전문기사 겸 박사가 됐다.
열대야가 한풀 꺾일 것 같았던 어느날 한낮. 홍익동에서 정수현 9단- 아니, 정수현 교수라고 해야 하나? 10년째를 맞은 대학의 교수생활과 박사학위 논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으니 그래야 옳을 것 같기도 하다.- 과 점심을 겸한 인터뷰자리를 가졌다. 한국기원 근처 식당에서 열무비빔밥으로 함께 무더위와 허기의 이중고를 위로하고 다시 한국기원으로 돌아와 각자 셀프서비스로 시원한 녹차를 한잔씩.
손종수(이하 손)- 늦었지만 축하 드립니다. 전문기사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경우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고 우리나라에서만 두 번째인데 신문, 방송도 그렇고 희소가치에 비해 의외로 주변이 조용한 것 같습니다. 축하인사는 좀 받으셨는지?
정수현(이하 정)- 주변에서 가까운 분들이 많이 축하해주셨죠. 요즘 박사학위 따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서···.
손- 최고학부에서 학문에만 몰두해 박사학위를 따는 일이라면 모를까 판, 검사보다 어렵다는 토너먼트프로의 세계에서 최고의 단위까지 오른 사람이 다시 학문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일은 아무리 박사가 넘치는 시대라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임교수로서 정해진 스케줄대로 강의도 해야 하고 토너먼트프로의 세계를 떠난 것은 아니니까 대국도 하셨을 텐데 바쁜 일정 중에 준비는 어떻게 하셨는지?
 정- 지난해가 제 안식년이라서 준비할 시간이 좀 있었습니다. 교수가 안식년이라고 해서 그냥 쉬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유용하게 보낸 셈이죠. 원래는 1년으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6개월이 더 걸렸어요(실제로 논문을 준비한 기간만 그렇다는 얘기다. 논문의 밑그림을 구상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몇 년을 더해줘야 한다).
손- 고려대학교 교육학 박사학위 논문이었죠? 제목이 꽤 길더군요. ‘대학생의 개념도 활용 바둑학습 및 바둑에 대한 사전지식이 지식습득과 문제해결에 미치는 효과'(39자나 되네요. 확실히 길긴 깁니다) 맞죠? 실은, 오기 전에 외우느라고 애좀 먹었습니다.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개념도 활용’이란 용어가 이 논문의 핵심 포인트로 보이는데요, 바둑계에선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정- ‘개념도(concept map)’는 개념들의 관계에 관한 명제를 담은 노드(node)와 관계성을 나타내는 링크(link), 즉 선이나 화살표로 나타내는 지식구조의 그림인데 학문적 연구, 보고가 드문 바둑계에선 익숙하지 않습니다만 학계에서는 교육학이나 인지심리학의 문제해결 과정에서 흔하게 쓰이는 용어입니다. 사실, 우리는 학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도 늘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에 부딪치며 살고 있죠. 프로들이 수읽기에 몰입하는 순간, 순간도 모두 해결이 필요한 문제의 장면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프로생활에서 체험한 대국 전후 기사들의 공동검토 과정이 바로 문제해결을 위한 개념도 활용수업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논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그런 느낌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죠. 통상적인 개념도 활용수업에 관한 연구는 전통적인 강의 중심의 수업집단과 비교하는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번 연구는 조금 다릅니다.
대학생의 바둑학습에서 첫째, 문제해결의 메커니즘을 활용한 문제풀이 중심의 수업과 비교하여 개념도 활용수업이 지식습득과 문제해결에 미치는 효과를 규명하고 둘째, 개념도를 활용하는 방식에 따라 지식습득과 문제해결에 미치는 효과를 규명하며 셋째, 학습자의 사전지식 수준에 따라 개념도 활용수업이 지식습득과 문제해결에 미치는 효과를 규명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입니다.
이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서울시와 명지대학교의 교양바둑수업에 참가한 대학생 8개학급 총 206명을 대상으로 수집되었다. 사전검사와 사후검사를 포함한 3주간의 예비실험을 통하여 나타난 검사방식과 검사내용의 문제점을 점검한 후 본실험에서 사전검사 및 사후검사를 실시했다. 정 교수의 연구는 첫째 문제에 대하여 개념도를 활용한 수업은 바둑분야의 전통적인 문제풀이 수업보다 학습자의 지식습득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고 둘째 문제에 대하여 수업방식이 학습자에 미치는 영향은 개념도를 활용한 수업과 전통적인 수업 간에 특별한 차이가 없으며 셋째 문제에 대하여 사전지식 수준이 낮은 학습자들에게는 개념도 활용수업이 전통적인 수업보다 효과적이었으나 수준이 높은 학습자에게는 두 수업방식 간에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은 향후 바둑을 배우고 싶어하는 학습자들에게 파급될 영향력을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하다. 교육자로서 좀더 효과적인 학습지도에 골몰하다가 장면, 장면 최선의 수를 찾아내는 프로들의 공동검토가 개념도 활용수업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 확인을 위해 실천에 옮긴 것인데 보다 내실 있는 강의를 위해 스스로 정해둔 목표의 하나였던 박사학위도 자연스럽게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문득, 몇 해 전까지 이 땅의 휩쓸었던 ‘마인드맵(mind map)’ 열풍이 떠오른다. 1960년 영국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대학원의 토니 부잔이 고안했다는 이 두뇌개발기법은 유능한 인재가 되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연상되는 생각을 지도 그리듯 이미지화해서 사고력, 기억력, 창의력을 높인다는 이 매혹적인 학습법 역시 개념도 활용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손- 97년에 세계최초로 명지대 바둑학과가 설립됐고 그 리더로서 10년을 이끌어오셨는데 일부러 맞춘 것은 아니겠지만 이 논문에는 교수생활 10년의 기념비적인 의미도 담겨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학교이야기 좀 해주시죠. 학생, 교수 그리고 10년 전 그때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지, 초기에는 커리큘럼에도 시시비비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정- 출범 당시 학생수는 20명이었죠. 지금은 120명이고 전임교수로는 저를 포함해서 최일호 교수와 남치형 교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내 손으로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노심초사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초기의 커리큘럼···. 그랬죠.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었으니까 시행착오가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아직은 좀더 노력해야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다양해지고 충실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바둑으로 표현하면 생존의 차원을 넘어 두터움을 갖춘 형태라고 할까. 한국바둑학회와 명지대학교 바둑학과가 주도해 2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국제 바둑학 학술대회도 처음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 보이더니 세 차례를 치러내면서 이제는 최고 전문가들의 학술대회다운 권위가 자연스럽게 내비친다.
한국이 단순하게 프로들의 기량만 출중한 승부의 세계최강국이 아니라 바둑문화를 선도하는 문화강국의 이미지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도 정 교수가 이끄는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10년의 성과다. 중국,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는 물론 멀리 미주, 유럽에서도 기예가 아닌 학문의 바둑을 배우기 위해 한국의 명지대학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있다는 것이 그 뚜렷한 증거다.
손- 졸업생들의 취업에도 상당히 신경 쓰시는 것으로 압니다. 어떻습니까? 고학력 실업자들이 양산되는 구직난의 시대라서 더욱 스트레스가 크실 텐데요.
정- 나름대로 애는 쓰고 있습니다. 사이버오로 같은 인터넷바둑사이트나 바둑에 관심을 가진 게임포털 그리고 바둑TV 쪽으로 꾸준히 취업이 되고 있죠. 물론, 그 쪽도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저는 바둑교육 쪽으로 진출하는 졸업생들이 늘어나길 바라는데 의외로 그 쪽의 성과가 미미해서 아쉽습니다. 이번 논문과 같은 연구도 좀더 효과적인 바둑교육과 학습을 위한 것인데 말이죠.
정 교수는 전국 어린이바둑교실의 학생들이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서 상당한 우려를 보인다. 어린이교육은 모든 분야의 발전에 근간이 된다. 현대의 모든 예, 체능에 관련된 어린이 교육은 눈부시게 진보하는데 현장의 어린이 바둑교육은 그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크다.
 1천만 바둑인구의 허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대한바둑협회가 새롭게 창립되고 스포츠 준가맹단체로 진일보하는 경사도 있었지만 90년대 초반에 찾아왔던 비상(飛上)의 기회를 놓친 한국바둑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험하다. 많은 어린이들에게, 또 입문의 문턱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설이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바둑은 여전히 어렵고 지루한 게임이다.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이제는 오히려 서구인들이 느끼고 스스로 한국을 찾아오게 만드는 바둑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전해줄 수 있는 바둑교육 전문가의 양성이 시급하다는 게 정 교수의 생각이다.
손- 교수생활 10년을 맞이한 해에 박사학위 취득. 이제는 뒤를 돌아볼 만한 여유가 있을 것도 같은데 뭐랄까요, 언젠가는 강단에서 물러나시겠지만 그 전에 이 일만은 꼭 이루고 싶다든가 하는 소망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정-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것입니다만 저는 한국바둑이 세계가 공유하는 문화아이콘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로들의 기량이 강하다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반드시 학문적인 연구와 그 결과들로 축적되고 잘 가공된 바둑문화의 컨텐츠가 있어야 합니다. 명지대 바둑학과는 궁극적으로 그런 일에 필요한 인재들을 양성하고 그런 환경과 문화가 정착되도록 선도하는 곳입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산학(産學) 컨소시엄’으로 문화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예는 많습니다. 저는 바둑에 관련된 기업체나 유관 민관단체가 그런 데 더 큰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합니다. 자리에 연연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기회가 주어지는 동안 그런 일들을 위해 더욱 노력할 생각입니다.
손- 다시 한번 교육학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고 좋은 말씀에 감사 드립니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1999년 4월 하버드대학 국제지역연구학회가 개최한 심포지엄의 결과를 엮은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는 책의 서문을 떠올린다. 세계적인 석학 새뮤얼 헌팅턴은 심포지엄 주최측의 주요 관심과 주장이 담긴 이 서문에서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헌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
“가장 핵심적인 보수의 진리는 이런 것이다. 한 사회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문화이다. 가장 핵심적인 진보의 진리는 이런 것이다. 정치는 문화를 바꿀 수 있으며 그리하여 정치를 정치 자신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
문화라고 하면 고부가가치의 문화산업만을 생각하는 정부의 문화정책 담당자들이 관심을 가져볼 만한 말이다.
사족 하나.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도정일 경희대 영문학부 교수가 위 인용의 끝부분 ‘정치를 정치 자신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은 ‘문화를 문화 그 자체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의 오역이라는 지적을 보았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상황에는 오역이라는 이종인 씨의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나만의 오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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