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의 CEO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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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CEO 이창호

2005-09-22 프린트｜스크랩

최고의 흥행카드 GS칼텍스배 결승5번기
96년이었나? 83년 이후 13년만에 일본 프로바둑 대삼관(大三冠- 이틀바둑으로 진행되는 棋聖·名人·本因坊 3대타이틀의 총칭)을 재석권하는 위업을 이룩한 조치훈 9단은 인터뷰 석상에서 감회를 묻는 기자에게 이런 소감을 밝혔다.

“대삼관 석권은 명예로운 기록이지만 크게 기쁘지는 않다. 과거에는 일본의 1인자가 세계의 1인자였으나 지금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감회를 고스란히 옮기면 이제는 ‘한국의 1인자가 세계의 1인자’라는 말이 된다. 90년대 중반 이후 압도적인 기록으로 세계바둑을 이끌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이니까. 제10회 GS칼텍스배 결승5번기에 팬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국내 최고의 우승상금이 걸린 기전에서, 세계가 뒤를 좇는 1인자 이창호 9단과 그 이창호 9단을 상대로 유일하게 50%(11승 11패)의 승률을 기록하며 국수, 기성 타이틀을 쟁취한 2인자 최철한 9단이 격돌한 최고의 흥행카드니까 말이다.

비록 이창호가 제2회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결승3번기에서 최철한을 꺾고 타이틀을 차지하긴 했으나 국수, 기성을 거푸 빼앗긴 데다 지난해 금강산에서 막을 내린 국수전 리턴매치에서 0승 3패의 수모를 겪으며 국수 탈환에 실패한 아픔과 비교하면 여전히 갚아야 할 빚이 남는다는 게 관측자들의 중론. 이창호의 마음 역시 크게 다를 리는 없을 것이다.

결승1국- 두터움 속에 감춘 반격의 칼
9월 8일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막이 오른 결승1국은 최근 변화를 시도중인 이창호의 취향이 시험기를 거쳐 적응기에 이르렀다는 확신을 심어준 한편의 드라마였다. 드라마의 주제는 ‘두터움과 폭주’.

장면도1

이창호의 흑으로 시작된 이 승부는 일찌감치 주제와 꼭 부합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그 결과를 극명하게 예고했다. 장면도1의 흑1이 검토진을 놀라게 한 수. 당시 검토실에선 ‘이창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두었다면 아마추어 감각이라고 비난 받을만한 수’라고 했으나 이창호에게는 이미 이런 견고함으로 최철한의 공격을 무력화하겠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흑3이 흑1의 두터운 의지를 일관되게 계승한 수라면 백2,4는 최철한의 공격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고압적 수법이다. 계속해서 백은 거친 호흡이 느껴질 만큼 폭주에 가까운 공격을 퍼부었으나 견고한 웅크림 속에서 정확한 타격으로 맞선 흑의 저항에 별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초반 전투에 대한 검토진의 촌평은 ‘흑의 성공’.

이후 진행에서 드러난 흑의 행마를 볼 때 장면도1의 흑1, 3은 중복(重複)에 가까운 두터움 즉, 위축된 수비의 형태가 아니라 적을 맞아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의 웅크림과 같은 반격의 준비 형태였음을 단언할 수 있다(관측자 중 일부는 이 형태를 보고 최철한에 대한 이창호의 강박관념이 표출된 것이라고 말했었다).

답답한 정체(停滯)를 느낄 만큼 더욱 견고해진 이 두터움은 결코 중복이 아니다. 대국 중반, 중앙 승부처에서 선보인 흑의 단호한 반격이야말로 ‘두터움 속에 날카로운 비수를 감추는’ 이창호의 새로운 취향이 완벽한 적응의 시기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입증시켜준 하나의 근거다.

결승1국을 지켜본 관측자들은 ‘폭주에 가까운 최철한의 무차별 공격을 더욱 두터워진 수법으로 철벽방어하고 과거 이창호의 바둑에서 보기 어려웠던 단호하고도 강렬한 반격으로 전국을 압도한 이창호의 명국’이라는 총평을 내렸다.

결승2국- 블루오션의 개척자 이창호
최근 블루오션(Blue Ocean)이라는 용어가 대대적인 유행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블루오션? 그게 뭘까?

가치혁신이론의 창시자로 각광 받고 있는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공동 집필한 ‘블루오션 전략’이라는 저서를 통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 용어는 경쟁자들이 치열하게 시장을 다투는 레드오션(Red Ocean)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설명된다. 즉, 경쟁 없는 무한의 시장공간을 뜻하는데 이 용어는 이창호 바둑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도 더없이 유용하다.

이창호는 결코 ‘늘 이기는 프로’가 아니다. 그는 1인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도, 오른 이후에도 끊임 없이 등장해온 천적(天敵)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1인자의 자리에 오른 이후 단 한번도 정상에서 끌려 내려온 적이 없고 천적의 지속적인 존재를 허용한 적도 없다.

한때 천적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곤란하게 했던 상대들은 이미 그의 뒤로 밀려나 있거나 밀려나는 과정에 있다. 이창호가 천적을 극복하는 과정은 위기의 기업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새롭게 발전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창호는 반상(盤上)의 최고경영자이며 블루오션의 개척자다. 국내외 경쟁자들의 압박이 극에 이르는 유혈사태의 레드오션임을 느낄 때 그는 홀연히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변화와 모험이다. 일본이 400년 동안 축적한 30,000 가지 이상의 정석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 최고로 자리 잡은 한국형 정석은 대부분 조훈현-이창호 사제대쟁기(師弟大爭棋)를 통하거나 이창호 본인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이창호가 시도중인 새로운 취향의 변화는 자신으로부터 국수, 기성 두 개의 타이틀을 빼앗아가며 집권의 최대위기를 몰고 온 천적 최철한의 극복으로 완성에 이르고 있다. 9월 21일 속개된 GS칼텍스배 결승2국에서 이창호가 보여준 것은 한층 업그레이드된 두터움. 이미 결승1국에서 선보인, 답답한 정체(停滯)를 느낄 만큼 더욱 견고해진 이 두터움은 과거에 이창호바둑이 가지고 있던 ‘방패’의 개념을 뛰어넘어 가열찬 공격의 의지를 담고 있다.

승부의 끝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시리즈의 분위기는 이미 2연승을 거둔 이창호의 영광으로 물든 것으로 보인다. 곧 이루어질 GS칼텍스배 결승전 18연승의 기록은 그 영광에 주어지는 부상(副賞)쯤 될까. 글쎄, 아직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창호가 이 시리즈를 통해 위기는 곧 기회라는 진리를 입증했다면 그가 잡은 호기는 곧 위기이며 최철한의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장면도2

답은 이미 나왔다. 장면도2의 흑 1과 같은 최철한의 폭주형 공격은 더 이상 이창호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 문제는 최철한이 얼마나 빨리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최철한은 원래 균형 잡힌 두터움을 바탕으로 펼치는 묵직한 공격으로 정상에 오른 기재다. 이창호를 뛰어넘기 위해 선택했던 폭주형 공격취향을 버리고 예전의 균형 잡힌 두터움을 되찾는다면 팬들은 결승3국 이후의 더 큰 재미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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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aph

｜ 2005-09-23 오전 9:05: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