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그 특별한 뼈의 개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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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그 특별한 뼈의 개성에 관하여

2005-07-19 프린트｜스크랩

많은 사람들이 ‘이창호의 바둑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보인다. 유유자적 두텁고 느리던 걸음이 때때로 급류를 타기도 하고 심심치 않게 폭주에 가까운 행태도 보여준다. 이창호 본인도 인터뷰나 사석의 대화중에 가끔씩 ‘달라지고 싶다’는 속내를 흘리기도 한다.

사실, 달라진 것은 바둑만이 아니다. 또 하나의 뚜렷한 변화는 성적이다. 올해로 기사생활 20년을 맞이한 이창호의 통산승률은 77.5%(1259승 361패). 어느 한 해의 기록이 아닌 20년의 평균승률이라는 점에서 경이롭기 짝이 없다. 국내외를 통틀어 이전에도 없었고 이창호 이후에도 나오기 어려운 기록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런 이창호의 승률이 2005년도엔 바닥까지 곤두박질했다. 슬금슬금 승수를 쌓아 상반기를 넘어서면서 60%대의 승률로 올라서긴 했지만 통산승률 77.5%를 기록중인 이창호가 여전히 60%대의 승률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기사생활 20년 동안 이창호는 단 한 해도 70%대 밑으로 승률을 떨어뜨린 적이 없다. 과연, 이창호의 바둑은 달라진 것인가. 그리고 그 변화는 바람직한 것인가.

최근 이창호가 자주 선보이는 빠르고 공격적인 취향만을 이야기한다면 ‘이창호의 바둑이 달라졌다’는 바둑계 안팎의 시선은 고개를 끄덕여줄 만하다. 과거의 이창호 바둑이 앞세운 것은 결코 속력(速力)이나 공격(攻擊)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이 변화가 고스란히 성적의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다수의 바둑 관계자들은 이창호의 부진을 ‘연령의 한계’라고 말한다. 연령의 한계가 있다는 점에선 동의하지만 ‘승부는 20대 초반이 절정기다. 천하의 이창호라도 30세가 되었다는 것은 절정기를 지났다는 뜻이고 따라서 성적도 하락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반적 통계에 근거한 논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럴 듯하지만 이 통계에는 문제가 있다. ‘승부는 20대 초반이 절정기’라는 일반적인 기준을 특별한 존재에게 적용시킨 오류다. 이창호는 통계의 표본추출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는 얘기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한국기원 30대 프로기사의 수입은 얼마나 될까?’라는 통계를 구한다고 하자.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이창호를 이 통계의 표본추출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0세의 이창호가 표본추출 대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포함되는 순간 한국기원 30대 프로기사의 수입을 실제와는 전혀 다른 숫자로 바꿔버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부사의 연령은 20대 초반이 절정기인데 이창호도 30세를 넘겼으니 성적이 하락하는 게 당연하다’는 분석은 맞지 않다. 승부세계의 그 누구도 연령의 한계를 피할 수는 없지만 모든 승부사가 똑같이 20대 초반에 절정기를 맞고 그 이후 똑같이 하향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이창호의 스승 조훈현을 봐도 그렇다. 조훈현은 86년에 11개의 타이틀을 석권하면서 생애 세 번째 전관제패를 기록했는데 그때 나이가 33세였다. 이창호가 스승을 상대로 첫 타이틀을 쟁취한 것은 90년 최고위전. 그때까지 이창호는 2승 13패의 절대열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조훈현은 적어도 37세까지 절정기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창호의 일시적인 부진은 연령의 한계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과라기보다 ‘취향의 변화’와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는 ‘안정’과 배치되는 개념이다. 이창호 바둑에 어떤 변화가 수용됐다면 필연적으로 그만큼의 안정을 잃게 될 것이고 그 불안정은 승부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것은 성적의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취향의 변화는 왜, 어떻게 오는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있었던 이창호의 부진은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그 시기가 이세돌, 최철한 같은 강력한 도전자의 급성장기와 맞물린다는 것. 그리고 이 부진은 일시적이며 반드시 부진 이전의 상태로 회복됐다는 것. 이 두 가지 특징은 이창호의 부진이 연령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뚜렷한 반증이다. 정신과 육체의 한계에 부딪쳐 정상에서 밀려난 1인자는 결코 예전의 위상을 되찾지 못한다. 타이틀을 한, 두개 획득하거나 세계대회에서 반짝 좋은 성적을 기록한다고 해서 정상에 복귀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창호 바둑의 변화는 ‘연령의 한계=>성적부진=>취향의 변화’라는 단순한 절차를 밟은 것이 아니라 ‘강력한 도전자의 출현(변화의 요구)=> 바둑의 변화(불안정)=>일시적인 성적 부진(적응의 과도기)=>정상 회복(적응)’의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이다. 이창호 바둑의 변화는 새로운 도전자의 새로운 취향에 적응하기 위한 취향의 변화라는 얘기다. 바둑의 변화? 취향의 변화? 이 둘은 어떻게 다른가. 이창호의 바둑이 달라졌다는 말은 이창호 바둑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대다수 프로들의 바둑은 ‘반발’이라는 뼈대를 가지고 있지만 이창호 바둑의 뼈대는 독특하게도 ‘순응’의 구조다. 뼈의 개성은 주변의 영향이나 의지에 의해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창호의 바둑의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바둑의 본질과 취향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애초부터 본질과는 무관한 취향의 변화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창호 바둑의 변화가 ‘새로운 적응을 위한 취향의 변화’라는 사실은 이창호가 가졌던 여러 차례의 인터뷰에서 쉽게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창호의 인터뷰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내가 변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특히, 공격적인 신예들이) 나를 변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세돌, 최철한 같은 신예들은 과거의 이창호가 천하를 평정할 때처럼 국면을 두텁게 서서히 닦아나가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이들은 공격만 강한 것이 아니다. 조훈현의 ‘빠른 창’이 있는가 하면 이창호의 ‘두터운 방패’도 가지고 있다. 수읽기도 깊고 끝내기도 신산(神算)에 뒤지지 않는다.

그뿐인가. 이세돌, 최철한 같은 상대는 국내, 국외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변화의 필요성을, 위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1인자가 아니다. 취향의 변화는 그렇게 찾아온다. 이창호의 말 그대로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나를 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변화는 필연적으로 안정의 기반을 허문다. 그때부터 새로운 취향이 몸에 익을 때까지 성적이 곤두박질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이창호의 부진이다.

그러나 그 부진은 바둑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적응에 필요한 과도기의 현상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주기로 끝이 난다. 국수 리턴매치에서 최철한에게 0-3으로 참패를 당하고도 대륙원정을 강행,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5연승을 거두며 6년 연속 우승의 신화를 이룩한 뒤, 한때 ‘이창호 저격수’로 각광받던 저우허양을 제압하고 춘란배마저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관록의 힘도 아니고 운이 좋아서도 아니다. 현란한 수사는 필요 없다. 그것은 오직 그가 강했기 때문이다.

부진의 늪에 빠졌을 때도 그는 애써 감추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말보다 행동으로 건재를 확인시켰다. 국내 최대규모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결승3번기에서 천적으로 떠오른 최철한을 2-0으로 압도했고 뒤이은 왕위전에선 화제의 도전자 옥득진을 3-1로 물리치고 10년 연속 제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통산 타이틀 획득 126회(비공식 2회 포함), 2005년 왕위, 왕중왕, GS칼텍스배, KBS바둑왕 4개 타이틀 획득으로 국내 타이틀 지분 최다 보유. 2005년이 마무리될 무렵이면 곤두박질했던 승률도 다시 70%를 넘어설 것이다. 그건 20년 동안 그가 보여준 믿음이다.

이창호에게도 연령의 한계는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사실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 누구보다 오래 1인자의 자리를 유지하리라는 것. 그 근거는 이창호의 두터운 생활 속에 있다. 이창호는 자신이 바둑판 위에 구현한 두터움의 철학을 고스란히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창호의 독서습관을 보면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책을 고를 때는 세상의 평판에 특별히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더러는 가까운 사람의 권유도 있지만 대부분 그때그때 관심 끌리는 대로 필요한 것을 찾아 한 권, 한 권 씹어 삼키듯 꼼꼼하게 읽는다. 아니, 이창호의 독서는 ‘읽는다’는 표현보다는 초식동물의 그것처럼 ‘소화시킨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관심의 분야도 다양하다. 때로는 대하소설이나 다큐멘터리로 지식을 넓히고 때로는 고사성어, 논어 같은 고전을 음미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말을 잘하기 위한 스피치훈련에 관한 실용서적도 읽는다. 부족함을 채우려는 마음과 그것을 조금씩 실천하는 어눌한 노력이 최초로 쓴 자신의 휘호와 같다. 성의(誠意)!

이창호는 특별한 1인자다. 10년 전에도 1인자였고 이 시간에도 1인자이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1인자의 권좌에서 내려선 이후에도 영원히 세계가 뒤를 좇는 최고의 프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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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눈망울

｜ 2005-07-19 오후 4:56: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