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결승3국부터 인천공항까지

이창호, 결승3국부터 인천공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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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결승3국부터 인천공항까지

2005-03-20 프린트｜스크랩

오후 5시 40분. 결승3국이 끝나고 취재진에 둘러싸인 채 이창호 9단과 저우허양 9단의 복기 검토가 시작됐다. 저우허양 9단이 돌을 거둔 시각은 정확히 5시 24분. 승부가 곧 끝날 것 같다고 알려진 시각부터 대국실 복도 앞은 몰려든 신문, 방송사의 취재진으로 인해 다시 북새통이 됐다.

패배를 알리는 저우 9단의 의사표시로 승부를 확인한 관계자가 대국실 문을 열자마자 취재진은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뛰어들었다. 주최측이 결승2국 때부터 세워둔 포토라인은 곧 무용지물이 됐다. 앞에서 찍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한정돼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종국장면을 카메라에 담지 않고 신문, 방송사로 돌아갈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기자는 없을 테니까.

이창호 9단은 솟아오르는 열기를 식히려는 듯 자주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한국에서도 대국 중에 세수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줄 정도로 열이 많다). 검토 도중 사방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는 피로를 가중시키는 주범. 간간이 눈을 감거나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지압하듯 눌렀다.

무언유어(無言有語). 검토는 고승들의 선문답(禪問答) 같은 침묵의 수담(手談)으로 이어졌다. 저우허양 9단은 움켜쥔 물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돌 무더기를 한쪽으로 쓸어놓고 시도하지 못한, 아쉬웠던 변화를 그려 보이다가 나중에는 손가락으로 바둑판 이곳, 저곳을 짚으며 겸손한 표정으로 조용히 이 9단의 답을 기다렸다.

이 9단은 패자의 정조(情調)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우 9단의 아쉬움에 동조하고 때로는 저우 9단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했다. 이 9단을 바라보는 저우 9단의 얼굴에 패배의 아쉬움이나 노여움 따위는 이미 없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한 승복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토가 끝나고 공개해설장으로 옮겨 쉬잉(徐瑩) 5단의 사회로 시상식이 이어졌다. 먼저 패자 저우 9단의 짧은 소감이 있었고 이 9단의 간단한 우승 소감이 이어졌다. 통역으로 나선 CCTV의 노성해 PD(순박한 곰을 연상시킬 만큼 한 덩치 하는 착한 얼굴의 우리 동포입니다)가 바짝 다가서서 이 9단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었다. 역시 차후 분석과 해독이 필요할 듯.

뒤이어 우승컵과 함께 15만 달러의 우승상금이 적힌 보드가 전달되고 우승, 준우승자 기념촬영. 사진을 전송하느라 잠시 검토실로 이동했던 기자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기자들이 늘어선 포토라인 뒤쪽 해설장 탁자 위로 올라서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 했다. 국후 행사는 6시 30분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이 9단은 동생 영호 씨와 함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다가 7시 30분 1층 중식당 ‘화원 (花園)’ 별실에서 선수단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현지 취재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조명탄처럼 터트리며 따라붙었으나 호텔 식당 측의 제지로 방까지 따라 들어서지는 못했다. 문밖 유리창으로 비디오카메라까지 들이대며 극성을 부리던 기자들은 ‘좀 말려야겠어요’라며 한국기원 전재현 과장이 문을 열고 나서자 알아서 뿔뿔이 흩어졌다.

선수단만의 오붓한 시간이 되자 우승을 축하하는 건배가 이어졌다. 최창원 선수단장이 ‘이 국수, 우승 축하하고 여러분도 모두 수고 많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게 돼 기쁘다’며 건배를 제의. 술은, 기자가 구해둔 안휘성 특산 46도 백주 커즈쟈오. 결승2국에서 승리한 16일 저녁 창사 시내의 ‘훠궈(火鍋- 얇게 썬 양고기와 채소 등을 끓는 양념육수에 데쳐 소스에 찍어먹는 요리)’ 전문점에 갔다가 그곳 매니저로부터 소개받은 술인데 값에 비해 맛과 향이 깊은, 괜찮은 술이다.

“이 술, 맛이 꽤 좋은데요.”

이 9단은 애주가는 아니다. 가끔 술을 마시긴 하지만 술보다 사람과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 주량은 사람들이 ‘그냥 보통이에요’라고 하는 정도인데 양주보다 중국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기자와 술 취향이 맞아 몇 차례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주인공의 입에서 ‘술 맛이 좋다’는 말이 나왔으니 한 병으론 부족하겠지. 비장해둔 두 병이 더 들어왔고(사실, 이 술의 대부분은 이 9단이 아닌 선수단이 해치웠다) 저녁자리의 분위기가 도도해질 때 기자가 물었다.

기자 “말은 못했지만 결승1국에서 졌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이제 우승을 했으니 말해도 되겠네. 이 9단은 기분이 어땠어요?”

이창호 “뭐, 늘 이길 수는 없으니까…. 질 수도 있죠. 그런데 결승1국은 진 것보다 양패를 못 본 게 더 쇼크였어요. 영호도 볼 수 있는 걸 못 봤으니….”

기자 “이 국수 같은 사람(정상의 프로)도 그런 걸 못 볼 때가 있나요? 그냥 바로 눈에 보이는 건데….”

이 9단은 다시 생각해도 쑥스럽다는 듯 웃는다. ‘언제 이어도 이어야 하는 대단치 않은 패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냥 무심코 이었다. 저우 9단이 패를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순간적으로 깜박했다’는 얘기였다. 프로의 맹점일까. 정상의 프로들은 오히려 기력이 약한 아마추어도 볼 수 있는 뻔한 곳에서 착각을 일으키나보다.

그런데 이 9단의 우승 느낌은 어떨까. 이 9단은 농심 신라면배 우승을 마무리하고 바로 이곳으로 날아와 춘란배 2연패에 성공했다. 이 9단의 마음 속에 있는 단체전과 개인전 그 우승의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기자 “신라면배 우승하고 춘란배 우승하고 어느 쪽이 더 기뻐요? 그러니까 단체전에서 우승한 거 하고 개인전 우승하고 어느 쪽이 더 기쁜지 솔직하게 한번 말해봐요.”

이창호 “음··. 좀 달라요. 솔직히 기쁘기는 춘란배 우승이 더 기쁘겠죠. 그렇지만 정말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건 신라면배 우승이에요. 개인전은 져도 나 혼자서 삭히면 그만이지만 단체전은 동료들의 기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게 힘들죠. 신라면배 우승하고 나서 정말 마음이 홀가분했어요.”

근사한 답이 바로 나왔다(이 9단은 이런 멋진 말을 왜 공식 인터뷰에서는 쉽게 하지 못 할까. 글쎄, 이 9단의 속마음이야 누가 알겠는가마는 아마도 바둑판 이외의 모든 곳에서는 수줍음 많은 보통 청년으로 되돌아가는 이 9단의 성격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목표가 뭐냐, 결혼은 언제 할거냐. 이런, 마른 빵 조각처럼 딱딱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물어보지 않아도 10년을 넘게 이 9단을 지켜본 기자라면 누구나 안다. 이 9단은 과묵하고 겸손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프로다. 당연히 잃어버린 타이틀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있다. 또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승부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승부자체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결혼 역시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미룰 이유가 없다. 언젠가 ‘나이 40 이전에는 해야겠죠’라고 말하지 않았나.

결혼하고 싶은 여자? 그것도 말하지 않았나? 농심 신라면배 우승 직후 기자들의 요청으로 합동 인터뷰를 가졌을 때 한국기원 양형모 홍보팀장의 입을 빌어 ‘곰보단 여우가 낫다’고 했다. ‘글래머가 좋으냐, 아담한 여자가 좋으냐’는 질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9단의 말을 놓친 것 같은데 기자는 분명히 들었다. 속삭일 듯 귓전을 스친 그 목소리. “둘 다 좋은 거 아닌가…” 하하하.

승부와는 전혀 다른 문제로 이곳 언론들을 들끓게 한 ‘이창호, 지하실 거주 사건’과 ‘화장실 변기 고장 사건’을 물었다. 기자도 약간의 마음고생이 있었다. 해명기사라고 올린 글에 감정을 실어 본의 아니게 일부 팬들의 비난을 자청한 꼴이 됐으니 말이다(이 자리를 빌어 다시 밝히지만 사실을 왜곡시킨 엉터리 기사와 그 글을 쓴 기자에게 화가 났던 것이지, 기사를 번역해 옮기거나 그 글을 읽고 노여움을 드러낸 팬들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오해를 풀어주시기 바란다).

기자 “지하실 사건, 화장실 변기 사건으로 말들이 많았는데 어땠어요?”

이창호 “어, 그런 일이 있었어요? 별거 아닌데….”

알지도 못했고 그런 게 무슨 화제가 되냐는 투다. 사실이 그랬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24시간 이 9단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다시피 한 현지 기자들의 취재경쟁이 빚은 해프닝일 뿐이었다. 지하실이라고 알려진 방은 테라스에서 호수가 바로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었고 화장실 변기야 어디에서나 고장날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이 ‘이창호, 지하실에서 묵는다’는 기사가 나돌아 팬들이 노여워하고 있을 때, 그것도 하필이면 이 9단의 방에서 발생하는 바람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꼴이 된 것이다(원인 제공자였던 중국 기자는 영호 씨를 몇 번이나 찾아와서 ‘고의가 아니었다. 경쟁 신문사들과 다른 기사를 쓰려고 하다 그렇게 됐다’며 사과했다).

저녁자리는 예상보다 길었다. 이 9단의 주량에서 유명인사들의 주량으로 이어지던 화제가 ‘말만 걸어도 수줍어하는 이곳 사람들’로 넘어갔다. 이 9단이 ‘처음 와본 곳이라 걱정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음식도 비교적 입에 잘 맞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순박해서 좋았다’고 하자 영호 씨도 ‘정말 순한 것 같다. 화장실 변기가 고장났다고 연락했을 때도 미안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쳐다보는 얼굴이 하도 순진해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고 말을 받았는데 그때, 기다렸다는 듯 여직원 둘이 들어와 사인을 요청했다. 체류기간 내내 이곳에서만 연속된 은밀한(?) 사인 공세였다. 매번 호의적인 웃음으로 사인하는 형의 얼굴을 바라보던 영호 씨가 이번에는 짐짓, 위엄을 보였다.

“뭐야, (기껏, 순진하다고 했더니)말하기가 무섭게 들어와서 또 사인하라고? 안 돼!”

쯧쯧, 푸근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 얼굴에 누가 겁을 먹을까. 사인 공세는 호텔 주방장에, 사장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식당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텔 대표는 '소설 영웅문 시리즈'로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신필 김용의 전집(이거, 무게가 만만치 않을 거 같던데…^^;)을 이 9단에게 증정하고 기념촬영을 가졌다.

선수단은 이튿날 오전 9시 30분에 호텔을 출발, 창사공항에서 11시 30분발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약 1시간 30분을 날아 경유지 베이징공항에 도착. 베이징에 거주하는 영호 씨와 헤어지기 전에 ‘전부 모여 사진이라도 하나 찍자’는 최 단장의 말에 기념사진 한 장 찰칵! 베이징공항에서 2시간 정도를 머물다 오후 3시 40분(한국시간 4시 40분)발 아시아나 OZ334편으로 출발. 선수단이 인천공항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무렵이었다.

이 9단과 선수단이 여행가방을 끌고 출구로 나왔을 때 번쩍,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뒤이어 귀여운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이 9단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었고 박수갈채와 환호가 쏟아졌다. 이 9단의 우승 소식에, 휴일 저녁시간을 마다 않고 공항까지 달려온 이창호 팬클럽 회원들이었다. 아, 이 장면. 낯설지 않다. 불과 20일 전 농심 신라면배 우승 후 귀국 때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의 재현이다. 감격의 복받쳐 오름을 감추려는 듯 안경을 밀어 올리던 이 9단의 표정도 그때와 같았다. ‘괜찮다면 차 한 잔 할 시간만 빼앗고 싶다’는 팬들과 함께 어울려 걸어가는 이 9단의 뒷모습을 보며 20일 전의 감격을 다시 떠올렸다.

여행가방을 끌고 공항 출구를 빠져 나오던 청년의 걸음이 흠칫, 멈춰졌다. 그 앞에, 청년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찰나에 떠오른 어리둥절한 표정이 그보다 더 빨리 사라지고 못내 쑥스러운 듯 청년은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안경을 밀어올렸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잠시 당황하던 청년의 얼굴은 곧 복받쳐 오르는 감격으로 물들었다.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피켓. 1986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프로의 무대로 뛰어든 이후 20년, 세계대회 우승컵을 안고 돌아온 것이 어디 한, 두 번일까마는 일찍이 이런 환영은 없었다. 언뜻 비친 안경 너머 두 눈의 습기는 눈물일까.

“미안하다 다 이겼다”
“누가 슬럼프래? 모두 꿇어!”
“농심배 30연승 전설은 끝나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공항 출구 전면 허리 높이로 둘러쳐진 펜스 뒤로 수십 명의 팬들이 청년을 향해 일제히 환호했다. 대기하고 있던 한국기원 직원과 팬들로부터 꽃다발이 안겨지고 다시 박수갈채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지나가던 소녀가 ‘뭐지? 누구야?’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좁히며 다가왔다.

저 남자는 누군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인을 하고 있는 걸까. 옷차림이 화려하지도 않고 조각처럼 미끈한 외모도 아닌 걸 보면 연예인은 아닌데. ‘아!’ 소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서너 걸음 앞으로 다가와서야 비로소 청년의 얼굴을 알아본 것 같다. 소녀는 허둥지둥 숄더백에서 디지털카메라 꺼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인파에 둘러싸여 사인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평범한 외모의 청년. 그는 누구일까.

환호하던 팬들의 맨 앞쪽에 선 남자가 피켓을 다시 들어올렸다. 거기 뚜렷하게 적힌 글씨가 보였다. ‘바둑의 신 이창호 응원천사 두터미’. 한중일 3국이 겨루는 국가대항 단체전 제6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 홀로 남아 중국, 일본의 정상급 프로 5인을 연파하고 6년 연속 우승을 이끌어낸 이창호, 바로 그였다. 이창호, 이창호! 팬들의 열띤 연호는 그가 기념촬영과 사인을 마친 뒤 한국기원이 대기시켜놓은 승용차에 몸을 싣고 떠날 때까지 공항 청사에 크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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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지킴이

｜ 2005-03-20 오후 10:20: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