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통신- 이창호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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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통신- 이창호는 살아 있다

2005-02-24 프린트｜스크랩

상하이 새벽 넋두리

24일 새벽 5시 15분. 일찍 잠이 깨었다. 과음을 하지 않고 자정 이전에만 잠이 들면 눈뜨는 시간은 늘 새벽이다. 조금은 슬프다. 이제,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짧다는, 몸의 아쉬운 자각이리라. 어슴푸레한 어둠을 더듬어 창문의 커튼을 젖혔다.

비에 젖은 새벽 상하이(上海) 왕바오허(王寶和) 호텔을 감싸안은 주장루(九江路) 거리는 몽환적이다. 한동안을 침대에 걸터앉아, 어두운 대지에 누워 부옇게 흩어지는 새벽비에 몸을 뒤척이는 빌딩의 무리를 바라보다가 전등을 켜고 욕실에 들어가 아침을 시작한다.

숙면 뒤의 세안은 상쾌하다. 두 뺨에 닿는 물의 감촉이 우유처럼 부드럽다.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거울을 바라본다. 거기,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듬성듬성 새치가 섞인 짧은 머리, 40대 후반의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엷은 눈썹, 그 아래 커다란 두 눈을 '겁 많다'고 표현하기에는 미간에 자리 잡은 '내 천(川)' 자의 깊은 골이 너무 사납다. 두툼한 코는 그런 대로 '사내다움(아직도 이런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유치하다)'의 만족감을 주지만 그 아래 얇은 입술이나 각진 턱은, 얼굴을 둥글게 하고 허리 주변을 미쉐린 타이어의 심벌처럼 만들어버린 비만만큼이나 밉다.

7시 25분. 함께 아침식사를 할까 해서 몇몇 분의 방에 전화를 넣어본다. 모두 받지 않거나 잠에서 덜 깬 무거운 목소리로 완강하게 밀어낸다. 별 수 없다. 혼자서 2층 뷔페식당을 찾을 수밖에. 사실, 비 내리는 거리의 풍경을 감상하는 옵션이 붙는다면 아침식사를 혼자서 하는 것도 각별한 흥취가 있다. 죽 한 그릇, 베이컨 몇 조각, 약간의 야채, 밤보다 조금 큰 찐빵 하나, 달걀 부침, 홀로 갖는 아침식사를 외롭지 않게 하려면 식탁이 풍성해야 한다.

후식은 딸기, 멜론, 파인애플, 수박 몇 조각. 평소에 잘 마시지 않던 우유를 석 잔이나 마셨다. 외국에 나가 우유를 마시면 늘 배신감이 섞인 불신이 솟구친다. 서울에서 마시는 우유는 왜 항상 물을 탄 것처럼 싱거운 느낌을 줄까. 아니다.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밀어낸다. 어제의 유쾌한 기억을 오래 붙들어두려면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이창호, 슬럼프도 권태기도 아니다!

상하이로 출발하던 날(22일). 인천공항에서 만난 이창호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덤덤했다. 물론, 웃으며 인사를 나누긴 했다. 익숙한 사람들과 마주칠 때 두 눈매와 입술이 아주 조금 부드럽게 휘는, 그것이 이창호의 뇌리에 입력된 '미소- 친근감의 표시'. 당대 최고의 승부사라도 타고난 성품이 과묵한 건 어쩔 수 없다. 나이 30을 넘기고도 그는 여전히 승부 이외의 일에 수줍음이 많다.

금강산대국(제48기 국수전 도전3국) 이후 하루를 쉬긴 했지만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쉽게 잊을 수 있는 아픔이 아니다. 도전무대에 올라 3연패로 밀려난 기록은 정상등극 이래 다섯 번째. 과거에도 없지 않았던 일이긴 하지만 그 세 번이 스승 조훈현과 공동연출했던 전대미문의 사제대쟁기(師弟大爭棋) 중 스승이 우위를 점하던(이창호가 1인자가 아니었던) 시기의 기록이었고 유창혁과 격돌했던 또 한번은 존폐 논란으로 승부욕이 사라진 패왕전(이창호를 3-0으로 뿌리친 유창혁은 결국, 비운의 마지막 패왕이 됐다)의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국수전의 3연패와는 크게 다르다.

성급한 관측자들은 '이창호의 시대가 가고 최철한의 시대가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신중한 정통 바둑저널리즘은 여전히 '이창호의 시대'에 무게를 둔다. 외형으로 드러난 기록으로만 보면 '이창호의 시대가 가고 최철한의 시대가 왔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최근, 국수전 3연패를 포함한 대 최철한전 8연패(속기전 제외. KBS바둑왕전, 한국바둑리그에선 이창호가 2승)가 그렇고 '기사생애 최악의 신년 스타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1승 5패의 참담한 성적도 그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이창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느낌은 다르다. 중앙의 바둑저널은 물론, 이창호로부터 국수, 기성을 탈취하고 다시 국수를 방어한 최철한 역시 '아직은 이창호 9단이 1인자다. 나는 아니다'라고 밝힌바 있다. 의례적인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최철한이 이창호에게 '상대적으로 강한' 면모를 보여준 것은 분명하지만 이창호 이외의 정상급 강자들과의 대결에서 이창호처럼 완벽하게 그들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기 때문이다.

1인자는, 일시적으로 타이틀을 쟁취하거나 과거의 1인자 한 사람만을 제압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이창호 이외의 정상급 강자들을 확실하게 압도하는 기량과 실적을 갖추지 못하고는 결코 진정한 1인자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최철한도 바로 그런 부분을 제대로 알고 말한 것이다. '최철한이 이창호에게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말은 최철한의 평가절하가 아니라 두 사람의 기풍과 취향의 상관관계를 설명하자는 것이다.

이창호는 장고파도 아니고 속기파로 분류되지도 않지만 제한시간을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기사로 꼽힌다. 시간을 들여 생각해야 할 때와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의 시간 조절에 능하다. 그런데 최철한과의 대국에서는 항상 먼저 초읽기에 쫓긴다. 또 가끔씩은 '최철한과 대국할 때 답답함을 느낀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거꾸로 최철한은 '이창호 9단은 응수를 편하게 해준다'고 한다. 상대가 편하고 내가 답답한 진행으로 이어지는 승부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최철한은 최정상의 기사다. 이 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지만 그가 이창호를 넘어뜨리는 데는, 모든 기사들을 압도한 1인자로서의 힘이 아닌 상대적인 기풍과 취향의 힘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이창호도 그런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 말이 많은 이창호의 변화는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창호는 '의도적인 기풍변화가 아니다. 상대가 나를 그렇게(변화하게)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이세돌, 최철한, 송태곤, 구리, 콩지에, 후야오위, 왕시 등 다양한 국내외 신예강자들의 도전에 효율적인 대응을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격렬한 변화가 자주 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모든 배경을 살피고 나면 '슬럼프'나 '권태기' 같은 진부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최근 곤두박질하고 있는 이창호의 성적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변화는, 안정과 상반된다. 탄탄한 실리구축의 초반, 두텁고 안정적인 중반운영, 정밀한 계산력을 앞세운 종반 마무리. 10여년간 정상을 지켜온 이창호 승리공식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80%를 웃도는 신뢰도를 가진 이창호의 안정적 승률에도 네거티브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창호는 살아 있다

이창호는 '슬럼프도 아니고 권태기도 아니다. 최근 부진에 그런 이유는 없다. 내 바둑의 변화는 상대에 의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창호는 2월 23일,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3라운드 상하이대회 첫 대국(본선11국), 대 장쉬전에서 스스로 입증했다. 초반 우하귀 신수로부터 파생된 공방에서 일찌감치 주도권을 장악하고 복잡한 좌상귀 도전을 강경하게 맞서 우위를 굳힌 뒤 중앙의 변화를 평정하고 '실질적인 일본의 1인자' 장쉬를 완벽하게 압도했다.

대국 중반 때때로 역전의 위기가 거론됐으나 이창호는 그때마다 검토진보다 한발 더 나아가는 앞선 수읽기를 선보이며 1인자의 무용(武勇)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한중 양국의 신예최강으로 구성된 검토진이 '역전'을 외치던 종반에도 중앙 흠집을 활용한 절묘한 수순을 밟아 중앙 백을 초토화하며 모든 우려를 일축했다. 본선3국부터 8국 연속 이어진 백번필승의 징크스를 단숨에 날려버린 쾌거. 이 대국의 승리로 기록된 본선 11연승(예선 포함 27연승)은 중일슈퍼대항전을 통해 중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의 단체전 개인 11연승과 타이기록.

이제 남은 상대는 중국의 왕레이 8단과 왕시 5단, 일본의 왕밍완 9단 셋. 모든 팬들과 함께 이창호의 3연승과 한국의 6연속 우승을 기원하지만 아직 결과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한국의 6연속 우승, 이창호 개인의 농심 신라면배 불패의 기록과 관계없이 '이창호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세계가 뒤를 좇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1인자는 상하이에서 그 자신의 건재를 입증하며 새로운 신화를 향해 다시 한번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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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초

｜ 2005-02-25 오전 8:37: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