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바둑의 붉은악마 프.바.사.와 매니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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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바둑의 붉은악마 프.바.사.와 매니아광장

2004-06-02 프린트｜스크랩

한 달 여의 고민을 접으며

이제 칼럼 쓰지 맙시다.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일일이 열거할 순 없지만, 같은 이유로 한 말도 아니었지만 이유는 많았다. 할 말 제대로 못하고 프로예찬이나 늘어놓을 바에야 글쓰기를 포기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밥의 의무도 아니었고 내 좋아서 써온 글이었는데 여기서 접은들 어떠랴 싶기도 했다.

한 달 사이에 적잖이 마음 고생을 했다. 얼굴을 맞닥뜨린 채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없는 자리에선 여러 차례 ‘죽일 놈’이 되기도 했다. 우습기도 했다. 바둑 밥 15년 먹은 빚이려니 하고 한국 프로바둑의 개혁에 관해 몇 가지 제언을 했을 뿐인데 무슨 대단한 글을 썼다고, 그것도 글을 올린 지 4개월이나 지나서 새삼스럽게 필화(筆禍)를 겪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건드려서는 안될 그분들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가까운 분들께서 전화를 주셨다. ‘한발 물러서서 돌아보라’는 분도 계셨고 직접 찾아오셔서 ‘오해가 있다면 풀고 사과하라’는 분도 계셨다. 걱정하는 분들의 마음을 잘 안다. 알기에 더 이상 나서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마음은 영 흔쾌하지가 않았다. 나의 진의(眞意)는 이런 게 아니었다는 걸 그분들도 알고, 그분들의 마음을 나도 알기 때문이었다.

몇몇 젊은 친구들도 전화를 주었다. 가벼운 농을 주고받았지만 이들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짧지만 가식이 담기지 않은 진실한 말은 큰 위로가 되었다. 한 달 여의 고민을 접고 ‘시론 / 칼럼’을 계속 잇기로 했다. 격려를 받든 비난을 받든 그것이 ‘바둑 밥 15년을 먹은 나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한국바둑의 붉은악마 프.바.사.

이 한 달 사이에, 내게 바둑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안겨준 것은 두 곳의 모임이었다. 한 곳은 5월 15일에 있었던 프로바둑기사사랑회(이하 프.바.사)의 오프라인 정기 모임이었고 또 한 곳은 사이버오로 매니아광장을 최고의 놀이터로 생각하시는 몇몇 분과 가졌던 5월 29일의 문경새재 나들이였다.

프.바.사(cafe.daum.net/badoll)는 지칭처럼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순수 바둑동호인 모임이다.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프로기사 팬카페로 출발(개설일 2002년 7월 11일), 지금까지 바둑 팬으로서의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10~20대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바둑계에서 가장 독특한 개성을 가진 최고의 팬클럽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회원수는 5,515명(손종수도 그 안의 한 사람이다).

카페지기는 ‘기다림의미학’님. 차차 소개하겠지만 프.바.사가 오늘의 위상을 획득하기까지 절대적으로 기여하신 분으로 ‘바둑을 향한 순수와 열정’이라는 프.바.사.의 이미지에 매우 잘 어울리는 성품의 소유자다. ‘기다림의미학’님과 함께 프.바.사의 안살림을 맡은 운영자는 ‘일지민지’, ‘천사여우’, ‘내가좋아하는…’, ‘sonicjinn’님(이상 가입일자순). 프.바.사.에선 연예스타 못지 않게 인기가 높은 분들이다.

프.바.사.는 ‘바둑계의 붉은악마’라는 수식어가 대변해주듯 다른 바둑동호회와는 뚜렷이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회원들의 참여열기에서 다른 동호회와의 비교를 거부한다. 요즘 바둑계에는 ‘최신 바둑정보나 소식을 알고 싶으면 프.바.사. 게시판으로 가라’는 말이 하나의 정설로 굳어졌다. 참여 회원 개개인이 각종 바둑사이트나 신문, 방송매체, 심지어는 외국에서까지 퍼 나르는 바둑정보나 소식의 신속, 다양함에는 전문 바둑사이트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다.

회원들의 참여열기는 정보나 소식을 퍼 나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 정도로는 ‘바둑계의 붉은악마’라고 할 수 없다. 프.바.사.의 오프라인 정기모임에 참여해보면 그 열기의 일부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보통 인터넷 팬카페에서 오프라인 정기모임을 가지면(활동이 왕성한 경우) 대략 2, 30명의 회원이 모이는데 프.바.사.는 평균 50~70명의 회원이 모여들어(분위기를 보면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다) 매번 장소 선정을 두고 운영자들이 골머리를 싸맨다.

프.바.사.가 다른 동호회와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은 또 있다. 자발적으로 참여중인 젊은 프로들이 40여명에 이른다는 것(이 글을 올리는 순간 50명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순수한 열정으로 바둑을, 프로들을 좋아하는 모임에 젊은 프로들이 40여명씩이나 참여하고 있으니 결속력이나 유대감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젊은 프로들과 프.바.사.는 그야말로 ‘찰떡궁합’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프.바.사.의 가장 큰 매력은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조차 사정없이 빠져들게 하는 강렬하고도 무해(無害)한 중독성이다. 지난 5월 15일 프.바.사. 정기모임에 처음 참석한 나는, 이전의 어떤 바둑모임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감동을 ‘먹었다’. 그 특별한 경험 몇 가지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인터넷의 어떤 모임에서도 거의 최고령자다(특별히 연령으로 자격을 따지는 모임이 아닌 이상). 몇 해전 활동했던 인터넷 영화모임에서도 그랬고 프.바.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을씨년스러운 최고령자 타이틀을 가지고 계시던 빈삼각님께서 ‘드디어 최고령자 타이틀을 벗어 던지게 됐다’며 홀가분해 하시던 그 표정이라니. 그 참! 그렇게 좋으신가. 참고로 말씀 드리면 빈삼각님은 팔방미인 정찬호님과 함께 프.바.사.의 정신적, 물질적(실은,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다) 기둥이시다.…오옷, 어디선가 강력한 째림이…ㅡㅡ+

각설하고, 프.바.사. 정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세 분의 회원으로부터 받은 ‘느낌’이었다. 첫째, 유야님. ‘초딩(초등학생)처럼 어려보인다’고 했다가 날카로운 째림을 당했다. 유야님은 프.바.사.에서 손꼽히는 인기스타인데 내가 무심코 ‘바둑은 몇급이나?’하고 물었더니 대뜸 ‘18급도 안돼요’라고 당당하게 밝혀준 진짜 매니아다. ‘바둑을 즐기는데, 프로기사를 좋아하는데 기력(棋力)이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이었다. 쿨럭;;;…요건, 유야님이 즐겨 쓰는 뻘춤모드.

‘팬으로서의 애정은 실력과 정비례한다’는 막연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는 그 순간 머리 속에서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 맞다. 바둑을 좋아하는 데, 프로기사를 좋아하는 데 기력이 무슨 상관일까. ‘2002 월드컵’에서 세계인의 눈에 경이(驚異)의 붉은 신드롬을 심어주며 월드컵 최고의 문화아이콘으로 떠오른 ‘붉은악마’ 역시 축구실력이 뛰어난 팬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새로운 깨우침을 준 유야님께 감사.

둘째, 정모에 뒤늦게 합류하신 한혜수님. 청주에서 올라오셨다는 이 훤칠한 미인은 다른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늦게라도 프.바.사. 사람들 얼굴을 보고 싶어서 뒤풀이좌석에 참석했다’는데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태연하게(?) ‘바둑을 전혀 둘 줄 모른다’고 밝혀 다시 한번 충격을 안겨주었다. ‘우연히 이창호를 좋아하는 친구와 웹서핑을 하다가 프.바.사.를 알게 되었고 바둑을 잘 모르지만 그냥 사람들이 좋아서 어울리게 됐다’는 한혜수님은, 바둑의 친화력이 바둑을 두는 사람들에게만 통할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게 해주었다. 역시, 고마움을 전한다.

셋째, 정모 장소였던 영등포 쟈스민기원에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막강7급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머큐리☆님. ‘초등학교 시절에 2년쯤 바둑을 배웠고 중, 고등학교 때 중단했다가 대학교에 들어와 바둑이 두고 싶어서 기우회가 있는 대학을 찾아가서(머큐리☆님의 동덕여대에는 기우회가 없단다) 바둑을 배웠다’는 머큐리☆님은 마치, 먼 바다로 떠났다가 남대천으로 돌아온 연어를 바라보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15년간 바둑 밥을 먹어온 나는 과연, 그만큼 바둑을 좋아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조금은 부끄럽다.

아, 또 있다. 영혼의별이라는 멋진 아이디를 가진 회원과 수담을 나누었다(만화 속에서 방금 걸어나온 것 같은 미소년의 이미지였는데 대국자세는 고스트바둑왕의 도우야 아키라 같았다). 문용직 5단이 쓴 ‘바둑의 발견’이라는 책을 가지고 있기에 물었더니 문 5단과는 서강대 선, 후배 사이였다. 영혼의별님은 며칠 뒤 사이버오로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LG배 세계기왕전 영문 인터넷중계를 맡았다고 한다. 인연이란 이렇게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사실, 위의 몇 분이 내게 준 느낌은 프.바.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프.바.사.의 모든 움직임은 바둑 팬카페의 단순한 모임이나 활동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바둑계 안팎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최근 이세돌, 송아지삼총사 등 젊은 프로들의 팬카페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것도 프.바.사.의 영향이다. 물론, 매력적인 방송 진행자로 일찌감치 토너먼트프로가 아닌 스타의 길로 들어선 김효정이나 하호정, 윤영선 사범들의 팬카페가 먼저 만들어지긴 했지만 팬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나 참여열기를 일으키는 데는 프.바.사.의 힘이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프.바.사.의 탄생과 그 활동은 21세기형 바둑커뮤니티의 방향을 제시하는 모범사례이며 세계화를 꿈꾸는 한국바둑 문화사업의 중요한 단초(端初)이기도 하다. 그 소중한 움직임이 멈춰지지 않도록 모든 바둑인들이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할 일이다.

매니아광장 예찬

자칫, ‘제 얼굴에 금칠하기’가 될 듯해서 어쩐지 조심스럽지만, 격의 없는 이야기 끝에 마련된 ‘매니아광장’의 문경새재 모임은 ‘익명의 폐해가 들끓는 인터넷공간에서의 자정(自淨)기능을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매우 소중한 만남이었기에 몇 자 적는다.

10여명쯤 모여 제법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불붙는 듯했던 게시판의 호응에는 크게 못 미치는 여섯의 매니아가 모였다. 뜻밖에도 조촐한 숫자에, 모임을 주도한 燕人님께 괜스레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숫자만 기대에 이르지 못했을 뿐 함께한 시간들은 그 어떤 모임에서의 시간보다 유쾌했다.

문경새재에서 가까운 점촌에 둥지를 틀고 계신 燕人님은 독특한 영남사투리가 제대로 배인 ‘맛깔 나는’ 사람이었다. 첫 대면서부터 익숙한 풀빛 웃음을 가득 머금고 두 손을 덥석 쥐시던 燕人님. 인사가 끝나자마자 여인이 길게 누운 형상을 한 주흘산 봉우리들을 설명해주신 燕人님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이웃 형님 같았다.

서울서 새재까지 함께 버스를 타고 오면서도 얼굴을 몰랐던 天羅地網님은 조순 전 서울시장의 탐스러운 백미(白眉)를 검게 물들인 듯한 멋진 눈썹에, 십팔나한의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호남형. 燕人님이나 天羅地網님은 나보다 5, 6년 연상이었는데도 나이 차를 알기 어려울 만큼 젊었다(지금 생각하니 燕人님께서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아이쿠, 청년이시네’라고 하신 말씀은 확실히, 덕담이었던 것 같다).

燕人님께서 정하신 ‘태조관’이라는 식당에서 차가운 맥주로 더위를 식히며 다른 분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데 燕人님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도착들 하셨나 했더니 웬 미국? 포틀랜드에 사시는 무정1님이었다. 매니아광장에 ‘무정부루쑤’ 시리즈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신 바로 그 분이다.

세상에, 그곳은 새벽 3시라는데 잠도 안 주무시고…. ‘눈에 익은 아뒤들이 문경새재에서 조우할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더라. 그래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고 하신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바꿔달라고 하시더니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수천km의 시공을 넘어 ‘부루쑤 하나로 인생을 달관한 듯한 목소리’가 고막을 흔들었다. ‘아이고, 본부장님 목소리가 20대시네’(이러셔놓고 매니아광장에는 ‘세끼를 굶언는지 정력이 하나두 읍쓸거가튼 사내 목소리’라고 혹평을 하시다니. 새재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심통이 꽤 크셨던 거 같다).

저녁 7시쯤 부산에서 출발한 굴초님과 박사르님 그리고 유향님께서 도착했다. 굴초님은 설명이 필요 없는 매니아광장 최고의 스타. 실제로 뵙기는 처음인데 글에서 느껴진 상상 속의 굴초님보다는 훨씬 날카로우셨다. 막걸리처럼 텁텁하고 넉넉한 웃음과 말투는 상상 속의 느낌과 일치하는데 상처의 아픔이 채 가셔지지 않은 듯, 우울한 빛깔의 굴곡들이 언뜻언뜻 내비쳤다…. 제멋대로 판단해서 죄송...^^;;

燕人님께서, 굴초님의 아드님으로 착각한 박사르님(기분 좋으시겠습니다^^)은 알고 난 지금도 51년생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다. 박사르님을 만나 즉석에서 궁금증 하나를 해결했다. ‘박사면 박사지 박사르가 뭡니까?’ ‘아, 그거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혈압제 이름입니다’. 과연, 감미당약국의 쥔장다운 아뒤. 굴초님과 동행하신 홍일점 유향님은 굴초님의 오랜 친구. 매니아광장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이 너무 좋아 새재까지 따라나선 매니아광장의 예찬자였다. ‘아무래도 이젠 바둑을 꼭 배워야겠어요.’ 쿨럭;;; 그럼, 아직 바둑을 모르신다는 말?

잘 차려진 저녁밥상에 燕人님께서 준비하신 문경의 토속명주 ‘호산춘(湖山春)’으로 반주를 하니 자연스럽게 ‘명정(酩酊)40년’과 ‘주도유단(酒道有段)이 흘러나왔고 그 적당한 주흥에 신선이 따로 없었다. ‘저녁산책이 어떠냐’는 燕人님의 제안으로 드라마 ‘태조 왕건’ 세트장이 있는 영남제일관문을 향했다.

가로등이 끊긴 길에서도 어두움의 불편을 몰랐던 것은 도시살이에서 알지 못했던 달빛의 ‘밝음’ 때문이었다. 반쪽 달이었지만 그 빛은 우리들의 마음을 비추기에 충분히 밝았다. 문득, 굴초님께서 문용직 사범의 칼럼 중 ‘함양의 달, 보길도의 달’을 이야기하셨고 내 머리 위로는 ‘달하 노피곰 돋으샤 어귀야 멀리곰 비취오시라’는 정읍사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모두 처음 대하는 얼굴이었지만 누구도 낯설어 하지 않았다. 좋은 밤, 좋은 만남, 멈춰도 좋을 시간이었다.

산책에서 돌아와서도 식지 않은 열기는 밤을 새워 바둑을 두며 호산춘을 곁들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매니아광장의 자정기능에 대한 토론부터 각각의 살아온 이야기들까지 순서 없이 내키는 대로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밤의 열기를 타고 꽃잎처럼 날아다녔다. 시인은 燕人님 뿐이었지만 그 자리, 그 시간만큼은 누구도 시인이 아닌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 아침 燕人님은 약속대로 유향님께 풀꽃반지와 시계를 만들어주셨고 한순간이지만 우리는 모두 40여년쯤 젊어졌다. 영남제이관문까지 조껍데기 막걸리의 취기를 빌어 제법 노곤한 산책을 마친 우리는 燕人님의 강추로 청포묵조밥을 먹었는데 산사(山寺)의 아침처럼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었다(혹시, 문경에 가실 일이 있는 분들께 강추).

燕人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를 안내한 곳은 도예가 설영진 선생의 부광요였다. 燕人님은 타고난 여행가이드처럼 완벽했다. 설 선생은 요즘 분홍빛이 감도는 다완(茶碗)에 심취하고 계신 듯했다. 이곳에서 다완에도 남성용과 여성용이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차 마시는 데도 순서가 있다’는 선생의 권유대로 말차, 우롱차, 보이차(비싼 것은 한 덩어리에 1천만원을 넘는다는 명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시간에도 상대성의 원리가 있고 행복한 시간은 언제나 짧은 법. 부광요를 끝으로 우리는 문경버스터미널 앞에서 이별을 고했다. 굴초님은 몇 번이나 두 손을 마주잡으셨고 모두 시간이 짧음을 아쉬워했다. 우리는 헤어지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의 만남은 결코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비록, 얼굴도 볼 수 없었지만 우리는 매니아광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늘 부대끼며 살아온 한 가족이었다. 누구도 낯설어 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매니아광장은 유령 같은 익명이 난무하는 가상 공간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살아 움직이는 휴식처였다. 나는 매니아광장에서 맺어진 이 소중한 인연들을 오래도록 이어가고 싶다. 굴초님의 말씀이 다시 가슴에 젖어든다.

짧은 인생, 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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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로스

｜ 2004-06-03 오전 11:07: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