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브랜드 이창호에 관한 小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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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브랜드 이창호에 관한 小考2

2004-04-06 프린트｜스크랩

이창호가 달라지고 있다?

이창호시대에 가장 괴로운 사람들을 꼽으라면 역시 신문, 방송 기자들일 것이다. 대국이 끝나고 무엇을 물어봐도 속시원히 대답하는 법이 없었고 목소리는 언제나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전광석화 같은 행마로 천하를 평정해, 팬들을 매료시켰던 스승은 말 한마디 한마디조차 바람처럼 경쾌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승부에서도, 그 뒤의 소감에서도 돌부처와 같았다. 기자들의 푸념은 늘 한결 같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이거야, 원···”

그러나 사람들은 흙 속에 묻혔던 보석을 찾아내듯, 타고난 조심스러움과 환경에서 비롯된 어눌함 속에 감춰진 그의 미덕(美德)을 찾아냈다. 흙을 털어내고 요란하지 않은 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저널리스트들은, 서두르지 않는 이창호의 바둑에서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만 질주하는 현대사회 구조적 병폐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느림의 철학’을 발견했다. 입단 이후 20년 가까이 일관되게 지속돼온 이창호의 어눌한 언행은 ‘대지(大智)를 품은 대우(大愚)였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저널리스트들은 일제히 ‘이창호가 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맞다. 이창호는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 일단, 표정이 밝아졌다. 여전히 부족한 듯하지만 예전보다는 웃는 얼굴을 많이 보여준다. 인터뷰의 목소리도 조금 커지고(아직 많이 작지만) 대화중에 전에는 좀처럼 듣기 힘들었던 조크가 간간이 섞이고 있다. 대화의 자신감이랄까,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창호는 달라진 것일까?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엄밀히 말하면 이창호가 달라지고 있다기보다 환경이 바뀌고 있으며 이창호는 그 흐름에 맞춰 왔을 뿐이라고 해야 옳다. 다시 말하면 이창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과거에도, 현재도 환경의 흐름에 자연스러운 속도로 적응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과 다르게 이창호 자신이 변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려운가? 다음과 같은 실례를 들면 아하, 하고 무릎을 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변화의 가장 큰 동인(動因)은, 정상의 세대교체다. 오랜 기간 그는 정상그룹에서 가장 어린 기사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 최고의 실력자이면서도 그 권위에 어울리는 언행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다. 타이틀전의 상대는 거의가 스승 조훈현이거나 대선배였고 승부는 대부분 그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지 않아도 조심스러운 성품을 지닌 그가, 패배의 멍에를 쓴 스승이나 대선배들에게 편하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또 그 면전에서 쉽게 기쁨을 드러낼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런데 그 환경이 달라졌다. 급성장한 신예들이 대거 정상으로 진입하면서 이창호를 에워싸고 있던 선배들의 울타리가 철거된 것이다. 간간이 조훈현, 유창혁이 출몰하긴 하지만 이제 정상은 목진석, 이세돌, 조한승, 최철한, 송태곤 같은 신예들의 각축장이 돼버렸다. 정상의 울타리가 10~20대 신예들로 바뀌었다는 말은 곧 정상그룹의 막내였던 이창호의 위상도 바뀌었다는 말이 된다. 타이틀전에서 패자를 배려하는 이창호 특유의 겸손은 여전하지만 예전처럼 상대를 어려워한다거나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는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최근 세계대회, 특히 단체전의 경우 출전 기사들을 보면 거의가 10~20대 신예들이 주축을 이루는데 당연히 그 좌장은 이창호의 몫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면 달라진 이창호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지난해 제주도에서 속개된 LG배 4강전이었던가. 대국 전날 저녁, 출전 기사들과 관계자들이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흥미로운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창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었고 그 테이블 양 옆으로 죽 둘러앉은 신예들은 부지런히 입으로 고기를 나르고 있었는데 철판 위의 고기를 이리저리 뒤집는 이창호나, 그것을 가져다 먹는 신예들이나 더없이 편한 얼굴이었다. 마치 외식 나온 형제들이 한 테이블에서 고기를 먹는 풍경이랄까. 이창호는 영락없는 맏형이었고 올망졸망 앉은 신예들은 영락없는 장난꾸러기 아우들이었다.

그날, 묘한 감동으로 뇌리에 새겨진 그 한 컷의 소박한 그림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 너무도 일찍 자기세대를 초월해버렸던 이창호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한국 프로바둑 1인자의 계보

바둑계 일각에서 이창호시대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10년 가는 권세 없다는 말도 있는데 이창호시대가 10년을 넘어서고도 제법 시간이 흘렀으니 그런 말이 나옴 직도 하다. 목진석이 KBS바둑왕전에서 이창호를 밀어내더니 이세돌이 LG배에서 이창호를 넘어섰고 최철한도 이창호로부터 국수를 빼앗는 등 최근의 상황이 이창호시대의 황혼설을 더욱 부추긴다. 예전처럼 어쩌다 한 판쯤 지는 정도가 아니고 타이틀을 빼앗기고 있으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바둑계 사정에 정통한 한 저널리스트는 일련의 상황을 거론하며 ‘지금까지, 다른 기사들에게 이창호는 신(神)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천계에서 노닐던 이창호가 드디어 하계로 내려왔다. 그는 여전히 강하고 여전히 1인자이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를 신격화하지 않는다. 그런 경외감이 사라졌다. 이창호도 하계의 인간들과 권좌를 다퉈야 하는 똑같은 인간이 된 것이다’라며 춘추전국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과연, 그런가.

정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신예들의 폭발력을 보면 그런 시대가 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은, 지금은 아니다. 이창호의 시대는 그렇게 쉽게 저물지 않는다. 한국바둑의 진정한 1인자의 계보는 조남철, 김인, 조훈현, 이창호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들과 겨룬 시대의 강자들도 타이틀전선에 뛰어들어 간간이 정상에 올라선 적이 있고, 팬들로부터 1인자 못지않은 사랑을 받은 스타도 있지만 그들을 1인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1인자의 기준은 ‘동시대의 강자들을 완벽하게 압도했는가’이다. 조남철이 그랬고 김인, 조훈현이 그랬으며 이창호가 그래왔다. 목진석, 이세돌, 최철한이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을 획득하며 대등한 실력을 입증했고 박영훈, 송태곤도 이창호를 넘어선 적이 있지만 아직은 모두 시작 단계일 뿐이다. 1인자와 대등한 실력을 입증했다고 해서 바로 1인자와 대등한 위상을 갖는 것은 아니다. 1인자란 타이틀전선에서 다른 강자들을 밀어내고 최대의 영토를 구축한 사람이다. 조훈현, 이창호는 2, 3년만에 그 일을 해냈고 10년 이상 그 자리를 지켰다.

또한 한 시대에 1인자가 둘이 될 수는 없다. 조훈현이 김인을 밀어내고 절대자가 되었듯이 이창호도 조훈현을 변방으로 몰아내고 나서야 1인자라는 말을 들었다. 이세돌이든, 최철한이든 또 다른 누구든 1인자가 되려면 타이틀시장에서 이창호를 제치고 최대의 지분을 보유해야 한다. 이창호에게 타이틀을 한, 두개쯤 빼앗았다고 해서 바로 1인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이창호의 시대가 마감되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이창호의 시대가 좀더 오래 갈 것이라는 예측에는 중요한 근거가 있는데 그 근거에는 조훈현이 존재한다. 한때 제자에게 밀려 무관으로까지 전락했던 조훈현은 좀더 넓은 무대에서, 좀더 높은 곳으로 복귀했다. 조훈현의 국제기전 우승횟수는 모두 11회인데 그 중 1989년에 획득한 잉씨배를 제외한 10회의 우승이, 이창호에게 1인자의 자리를 확실하게 이양한 1994년 이후의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이 일련의 사실은, 조훈현이 1인자의 자리에서 밀려난 것이 결코 약해서가 아니라 이창호가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라는 반증도 된다.

조훈현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는 전제로,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국제기전은 제한시간이 짧아서 체력소모가 적고 조훈현처럼 스피드를 앞세운 호전적 감각파에게 유리다는 것. 둘째, 세계대회는 모두 선수권전이라 타이틀을 획득해도 차기대회 본선 1회전 통과 정도의 미미한 프리미엄만 보장한다는 것. 셋째, 각국에서 선발된 강자들의 층이 두텁다는 것. 둘째, 셋째 이유는 세계가 승복한 이창호라 하더라도 쉽게 결승에 오르지 못하는 확실한 장치다.

실제로 조훈현이 국제대회 결승에서 이창호와 조우한 것은 모두 세 차례인데 두 차례는 TV바둑아시아선수권전으로 의외성이 높은 속기전 단판 승부였고(1995년 이창호 우승, 2000년 조훈현 우승) 번기(番棋)는 1999년 제1회 춘란배뿐이었다(2-1 조훈현 우승). 여기서 둘째, 셋째 이유는 국내에서 ‘이창호의 시대가 좀더 오래갈 것’이라는 근거로 치환된다. 국내기전은 세계기전과는 정반대로 타이틀홀더의 프리미엄이 크다. 본선을 거쳐 올라온 도전자만 상대하면 되는 도전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는 당대의 1인자를 몇 차례 꺾으면 그것이 곧 1인자 교체의 절차나 다름 없었다. 그만큼 강자들의 층이 엷었다. 조남철을 밀어낸 김인이 그렇게 1인자가 됐고 김인을 끌어내린 조훈현이 그렇게 절대자가 됐다. 김인이 등장하기까지 조남철의 적수가 없었듯이 조훈현이 1974년 부산의 최고위전로부터 1976년 국수전 폭격을 시작으로 한강다리를 완전히 건널 때까지, 김인에게 진정한 의미의 라이벌은 없었다.

유학파 윤기현, 하찬석이 국수전, 왕위전에서 타이틀홀더가 됐고 엘리트 정창현, 속사의 달인 김희중이 기왕전을 제패했지만 그것은 1인자까지도 낭만의 세계에서 노닐던 김인의 시대에서 투철한 승부혼이 없이는 1인자가 될 수 없는 냉엄한 세계의 조훈현시대로 접어드는 과도기의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이다.

1인자에게 마땅한 적수가 없다는 현상은 조훈현의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훈현에게 라이벌은 없었다. 이전의 1인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완벽한 2인자 서봉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조훈현이 전관제패라는 위업(1980, 82, 86년)을 세 차례나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 자신이 군계일학(群鷄一鶴)의 강자였기 때문이겠지만, 보다 수월하게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저널리스트들이 기꺼이 ‘조서밀월시대’라고 부를 만큼 탁월한 2인자 서봉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봉수는 조훈현의 영토를 지켜주는 거대한 방파제였다. 파도처럼 밀려왔던 강자들은 모조리 서봉수에게 가로막혀 흩어졌고 조훈현은 그 서봉수만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서봉수라는 방파제를 넘어선 강자만이 조훈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1988년에 조훈현을 꺾고 대왕을 획득한 유창혁에게 ‘16년만의 대변란’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봉수를 뛰어넘어 조훈현을 알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입증하고도 남는다. 조훈현은 그만큼 위대했고 서봉수는 그만큼 완벽한 2인자였다.

우리는 이창호가 있기에 행복하다

이창호의 집권 초기에는 조훈현이, 과거의 서봉수가 그랬던 것처럼 완벽한 2인자의 역할을 했다. 조훈현은 거의 모든 기전에서 도전권을 휩쓸며 전대미문의 사제대쟁기를 펼쳤다. 그런 조훈현을 쓰러뜨리지 않고 이창호의 얼굴을 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따금씩 유창혁이라는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 이창호의 권좌를 적셨으나 곧 흩어져버렸다. 사람들은 ‘조서밀월시대’가 ‘이조밀월시대’로 바뀌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달랐다. 그는 이전에 밀려난 그 어떤 1인자보다 현명했다. 조훈현은 변방의 2인자로 머물지 않고 시선을 세계로 돌렸다. 그리고 조훈현이 세계대회에 전력투구할 때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부터 사천왕(조-서-유-이)의 턱밑에서 각축전을 벌이던 강자들이 하나씩 둘씩 새롭게 도전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84년 25연승을 기록했던 임선근이 10년만에 명인전 도전무대를 밟는가 하면 학구파 양재호(1992, 95년 명인전, 96년 국기전)와 최규병(2000년 기성전)이 사천왕의 성역에 발을 내디뎠다.

특히, 이창호의 동갑내기 최명훈(1996, 99년 명인전, 97, 98, 2001년 LG정유배, 97년 기성전)은 사천왕 이후 이창호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한 기대주였다. 비록, 이창호를 끌어내리는 데는 실패했으나 8회가 진행되는 동안 5회나 결승무대에 오른 LG정유배를 통해 우승의 한을 풀었다. 사람들은 최명훈을 ‘LG정유배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실패로 끝난 거사였으나 비사천왕으로서 당당하게 이창호와 겨룬 이들의 분전은, 한국바둑의 정상권에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신예들에게 추정불능의 아득한 거리에 있던 이창호를 가시권으로 끌어당겨주는 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창호 독주 10년의 21세기로 접어들어 목진석(2000년 KBS바둑왕전), 이세돌(2003년 LG배 세계기왕전), 최철한(2004년 국수전)이 차례로 최고의 목표였던 이창호를 일순간이나마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터워진 정상의 층은 아직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은 이창호에게 훨씬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과거 1인자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2인자가 이제는 그룹으로 양산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두텁게 형성된 정상의 8부능선에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며 어느 한 사람만의 도전을 쉽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양한 기풍의 도전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된 이창호 역시 이전보다 훨씬 힘겨운 싸움을 각오해야겠지만 그 부담이, 이창호와 대등한 기량을 갖춰가는 신예들의 도산검림(刀山劍林)을 뚫고 올라서야 하는 도전자보다 큰 것은 아니다. 도전기 시스템에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기득권이다.

이창호의시대가 좀더 지속되리라는 근거는 또 있다. 승부에 관한 한, 나이 서른이 꽉 차도록 바둑 이외에는 특별한 물욕이나 집착을 보이지 않는 이창호의 성품은 최선의 것이다. 진리를 갈파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나이인 듯하면서도 때때로 달관한 도인의 풍모마저 보이는 이 과만한 천재는 부족함을 느껴도 결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 마음이, 바둑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한결 같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이창호는 LG배에서 이세돌에게 패했을 때에도, 최철한에게 국수를 빼앗겼을 때에도, 공격바둑에 약점이 노출된 것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에도, 패배를 안겨준 후진들의 장점만을 칭찬했을 뿐 어떤 변명도, 어떤 아픔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보여주었다. 4월 1일 막을 내린 LG배 세계기왕전 결승4국에서, 이전에도 그랬듯이 또 한번 변함없는 모습으로 노력하는 천재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승, 이창호시대의 불변함을 입증했다. LG배에선 8회가 진행되는 동안 절반을 제패하는 세계바둑사상 초유의 기록이다. 통산타이틀획득 119회. 국제대회 우승 20회(메이저기전 16회). 현재 LG배, 잉씨배, 춘란배, 도요타덴소배까지, 세계 6대기전 중 삼성화재배와 후지쯔배를 제외한 4대기전을 제패하고 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사람들은 소중한 것이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가치를 곧잘 잊는다. 숲속에 있으면 나무를 볼 뿐 숲을 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이창호의 가치는 우리의 울타리 밖에서 더 크고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다. 중국기원의 천쭈더(陳祖德) 주석이 최근 중국의 CSK배 우승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정말 기쁘다. 이번 우승은 중국 기사들의 자신감을 높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됐으며 중국 기사들의 실력이 전체적으로 한국 기사들과 대등해졌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창호 같은 기사가 없다. 우리는 아직 이창호를 넘어선 것이 아니다.”

중국리그 최우수기사로서 천원을 방어한 구리(古力)의 말도 있다. 그는 최철한과의 한중천원전 전망을 묻는 자리에서 지난해 후지쯔배 준우승자였던 송태곤을 2-0으로 꺾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자신감을 드러냈는데 중국저널이 만들어준 ‘삼번기왕(三番棋王)’이라는 칭호는 겸손하게 사양했다. 그 이유가 이창호 때문이었다고 한다.

“모두 농담으로 한 이야기였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이창호를 번기(番棋)에서 이긴다면 그때는 생각해보겠다(번기왕이라는 칭호를)”

어떤가. 바둑에 관한 한, 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던 세익스피어와 무엇이 다른가. 이 땅에서 바둑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창호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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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돌스

｜ 2004-04-06 오전 11:06: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