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브랜드 이창호에 관한 小考1

신뢰의 브랜드 이창호에 관한 小考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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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브랜드 이창호에 관한 小考1

2004-04-02 프린트｜스크랩

이창호의 성품은 갑각류(甲殼類)

내가 아는 그는 지독히도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타고난 성품이 그런 듯하고 철이 들기도 전에, 천하가 인정하는 대가(大家) 조훈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데다, 입단 이후 천하를 제패하기까지 대선배들의 울타리 안에서 홀로 커왔다는 특수한 환경의 영향이 그 성품을 더욱 견고하게 지켜준 것으로 보인다(그가 큰 승부를 끝낸 뒤 그토록 말을 아끼고 어려워한 이유는 그 상대가 대부분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스승의 뒤를 이어, 바둑사상 두 번째 어린 나이로 프로의 관문을 돌파하고(86년 11세 입단) 그 4년 뒤 최고위전으로부터, 바둑천하를 세 번씩이나 완벽하게 평정했던 위대한 스승의 권위를 허물기 시작했는데 타이틀전선에 뛰어들어 최고의 자리를 향해 질주하던 이 시기에, 의사소통이 수월한 비슷한 세대의 동행을 찾는 일은 불가능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늘 쟁쟁한 대선배들의 울타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두터운 말문을 트고 속내를 편히 드러낼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너무도 일찍 자기세대를 초월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타고난 겸허함과 어쩔 수 없는 환경의 영향을 생각하면 그의 성품이, 밝고 활달한 동년배들과는 대단히 이질적인, 때때로 음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갑각류(甲殼類)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각류는 두터운 외피 안에 어떤 류보다 부드러운 속살을 가지고 있다. 이창호는 그런 사람이다.

91년의 기억 한 토막. 당시 이창호와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의 한일신예대표기사대결 5번기는, 한국의 정상과 일본 신인왕의 격돌이라는 점에서 승부결과가 어떻든 한국 쪽에 불리한 미스 매치였다. 이때의 한국바둑은 국제 교류전의 대상자선발에 관한 협의나 의전절차에 꽤 어수룩했던 것 같다.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정상이 신예대표기사라는 딱지를 달고 일본의 신인왕과 겨루는’ 언밸런스한 이벤트를 기획한 사람에게 상당히 분개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이런 관련 기사가 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진정한 최강자가 되려면 이런 국제시합을 통해 감각과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이런 도전을 피하면 프로의 정당한 자세가 아니라고. 정말이지 그건 미스 매치의 구차한 핑계에 불과하다.

요다가 도전해온 것이라면 파이트머니를 달리 할 수도 있고, 요다가 도전하는 외양을 갖출 수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이벤트 입안자들이 협상과정에서 해야 할 일이다. 1인자의 위상을 제대로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그게 할 소린가? 뭐, 이제 와서 지나간 일들을 시시콜콜히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때의 일들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다시금 떠올리는 이유는 다른 데 있으니까.

91년 2월 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층 아테네가든. 점심 휴식시간이 12시 30분부터 1시 10분까지였으니 12시 50분에서 1시 사이였을 것 같다. 대국장 옆으로 정원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쾌적한 휴게실이 있었는데 막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가 창가에 서서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격전장을 벗어나 승부를 잊고 바깥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그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이 솟구쳤다. 동시에 ‘15세(15년 7개월) 승부사의 망중한(忙中閑)’이라는 카피도 떠올랐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고 초점을 맞추려는 순간 그가 돌아섰다. 그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의 눈 주위로 물결 같은 경련이 일어났다. 결코 휴식을 방해했다는 노여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나 혼자만의 휴게실은 아니지만, 아직은 휴식 시간이고 대국이 재개될 때까지는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불쑥 열고 들어왔다. 상대는 나보다 나이가 두 배쯤 많은 기자. 잠시 혼자 있게 해달라는 말을 어떻게 할까. 혼자만의 공간을 지키려면 상대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한다. 찰나에 뇌리를 스치는 이런저런 갈등이 눈가의 경련으로 나타났고 기어이 의지를 드러낸다. 예의, 입안에서 맴도는 그 작은 목소리.

“저···, 죄송하지만 혼자 있고 싶은데요···.”
“아, 그게··· 미안해요.”

솔직히 당황했었다.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물러난 기자의 상상처럼, 잠시 격전장을 벗어나 승부를 잊고 바깥 경치를 감상하는 여유 따윈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입단 5년차 15세의 신예지만 엄연한 정상. 그 내면에는 ‘한국의 정상으로서 일본의 신인왕쯤은 반드시 꺾어줘야 한다’는 격랑이 들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드시’라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압박감도 커지는 법.

그는 그 시간, 누구에게도 내비치지 않고 홀로 한일간의 자존심이 걸린 특별한 승부가 주는 극도의 긴장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이창호는 1–3으로 졌다. 승부의 결과는 전적으로 이창호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그에게 ‘한국의 정상이니까 일본의 신인왕쯤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언밸런스한 대결의 부담을 안겨준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요즘의 신예라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이세돌, 최철한, 송태곤이라면? 당당하게 ‘나가주세요’라고 요청할까, 아니면 상관 없다는 표정으로 무시할까. 아니, 조금 더 생각해보니 비교 자체가 우습다. 이창호가 메이저 첫 타이틀을 획득한 나이는 14세(1989년 KBS바둑왕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이창호를 격파한 이후 단숨에 최고스타의 반열에 오른 이세돌은 17세(2000년 배달왕기전), 그 뒤를 맹렬히 쫓고 있는 최철한은 18세(2003년 천원전), 후지쯔배 준결승에서 이창호를 밀어내고 대기(大器)의 편린(片鱗)을 드러낸 송태곤은 17세(2003년 KBS바둑왕전).

불과 3, 4년의 차이라고 말하지 마라. 이창호는 이세돌과 송태곤이 메이저 첫 타이틀을 획득한 나이에 세계대회 우승을 기록했고(1992년 16년 6개월 동양증권배) 최철한이 국수를 쟁취한 나이에 국내 16개 기전의 모든 타이틀을 1회 이상 획득하는 대기록을 세웠고 13개 기전을 동시에 제패했다(1994년 19세).

비교가 안된다. 게다가 질식할 것 같은 선배들의 울타리 안에서 홀로 커온 이창호와, 비슷한 또래의 신예들과 거리낌 없이 집단으로 커온 이들의 환경은 전혀 다르다. 타고난 성품이 다르고 환경이 달랐으며 출세기의 나이가 또한 다르니 이창호와 신예들이 서로 크게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계가 이창호를 쫓고 있다

90년대 한국 프로바둑사를 아로새긴 조훈현-이창호의 사제대쟁기(師弟大爭棋)는 전 기전에서 전대미문의 보은대전(報恩大戰)으로 이어졌다.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가르침을 내린 스승을 추월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은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그것은, 품 안에서 키운 호랑이에게 먹히는 비극의 과정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철혈(鐵血) 조훈현의 시대가 저물고 부동심(不動心)을 앞세운 이창호의 시대가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국내는 물론, 세계가 이창호를 1인자로 인정하면서부터 이창호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계가 이창호를 1인자로 인정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창호 이전의 어느 누구도 한중일 3국으로부터 ‘세계최강자’로 공인을 받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있다면 극성기의 일본 프로바둑에서 ‘만천하 선상선(先相先)’을 외쳤던 우칭위엔(吳淸源) 선생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세계’라는 개념이 약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과 무엇을 비교할 만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고 바둑에 관한 한 일본이 곧 세계였던 시기였다. 우칭위엔 선생 이후 본격적인 세계대회가 러시를 이루었지만 누구도 세계최강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조훈현이 국내바둑을 세 차례나 완벽하게 평정하고 제1기 잉씨배를 제패했을 때도 중국과 일본은 ‘강하긴 하지만 최고는 아니다. 우리에겐 언제든 조훈현을 넘어설 기사가 있다’는 거부감을 드러냈었다.

사실, 세계를 제패한 상대국의 강자를 세계최강자로 인정하지 않는 마음은 3국이 모두 같았다. 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일본 프로바둑의 거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1인자로 군림한 조치훈도, 일본 바둑저널로부터 ‘슈사쿠(秀策) 이래 최강의 기사’라는 평가를 받은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도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세계최강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제1기 잉씨배 결승에서 조훈현과 자웅을 겨룬, 일중슈퍼대항전 11연승의 중화영웅 녜웨이핑(攝衛平)도 한국, 일본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은연중 한중일 3국 사이에 ‘누군가 세계타이틀을 쟁취했다고 해도 그때뿐, 반드시 그를 세계최강자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통념이 형성됐다. 그것은 도저히 허물 수 없는 철벽 같았는데 바로 그 철벽에 균열을 일으킨 사람이 이창호였다.

그가 1992년 동양증권배 획득으로 첫 세계타이틀을 기록할 때만 해도 일본과 중국은 이창호를 ‘우물 안의 왕개구리’ 정도로 낮춰 보았지만 그 착각을 접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듬해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일본바둑 정상으로 복귀한 ‘불사신(不死身)’ 조치훈이 3연패로 무너졌다. 1996년 세계바둑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던 중국의 마샤오춘(馬曉春)을 상대로 후지쯔배를 쟁취했고 이것은 세계바둑의 절대강자 이창호의 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이 됐다.

이창호는 1997년 LG배와 삼성화재배를 동시 제패하고 2000년 바둑올림픽으로 불리는 잉씨배를 거쳐 2002년 춘란배, 2003년 도요타덴소배를 거머쥐면서 모든 세계타이틀전에서 1회 이상 우승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됐다. 그 와중에 한중일 3국 사이에 형성됐던 ‘누군가 세계타이틀을 쟁취했다고 해도 그때뿐, 반드시 그를 세계최강자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통념의 철벽이 무너졌다. 중국과 일본이 충심으로 이창호를 경배했다.

일본은 일본기원 발행 바둑주간지 ‘슈칸고(週刊碁)’를 통해 ‘세계가 이창호를 쫓고 있다’는 기사를 톱으로 다뤘고 중국은 한술 더 떠 각 신문 보도마다 일제히 이창호의 이름 앞에 ‘천하제일’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창호는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그 중에 우뚝 솟은 에베레스트였다.

(계속) ※ 1,2편 한꺼번에 올렸다가 너무 길어서 토막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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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4-04 오후 3:38: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