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문턱, 3人3色의 바둑느낌2[조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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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문턱, 3人3色의 바둑느낌2[조혜연]

2003-12-16 프린트｜스크랩

인연
두 살 때 신문을 읽었단다. 대단하다. 조치훈 9단의 어린시절 일화가 생각난다. 서너 살쯤인가. 어른들의 손에 붙들려 찻집에 갔다가 음료수병에 붙은 상표의 한글을 읽어 ‘아, 고놈 참 똑똑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그 재미에 한글을 일찍 깨우쳤다던가. 프로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능이 남다르게 뛰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바둑을 배우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가 먼저 답을 주신다. ‘애가 한글을 일찍 깨우치더니 하도 책만 파길래 책에서 좀 떨어뜨려 보려고 바둑을 가르쳤다’고.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다. 대부분의 프로들은 가족이나 친지 등 주변 사람들이 재능을 알아보고 바둑을 가르친 경우가 많은데 세상에, 너무 책만 봐서 떼어놓으려고 바둑을 가르쳤다니. 부모가 바둑을 전혀 모르는 집안에서 프로기사가 탄생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문제는 아이를 바둑교실에 보낸 후에 생겼다. 어머니의 생각대로 책에서 떨어져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번에는 바둑에 매달려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처음엔 대충 몇 개월쯤 보내면 ‘바둑이란 게 따분하고 재미 없으니까 제풀에 떨어지겠지’라고 생각한 어머니의 계산이 크게 빗나간 것이다. 평소에 그렇게 말 잘 듣던 아이가 바둑만큼은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인연이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데뷔
흙은 보석의 빛을 오래 덮지 못하고 주머니 속의 송곳은 곧 날카로움을 드러내는 법. 특출한 아이의 재능은 동네 밖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그 속도가 빛살처럼 빨랐던 것은 당시 대대적으로 유행하던 PC통신 덕이다. 촌스럽게도 시퍼런 바탕에 하얀 칠판글씨가 주르륵 이어지던 그때 그 시절의 PC통신 대화창을 기억하시는지?

무지막지하게 부과되는 전화요금을 고스란히 물어가며 통신바둑을 두던 시절, 아이는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던 통신바둑 아저씨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름만 대면 당장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아마추어 맹장들이 앞을 다투어 아이를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둑을 두다가 매운 솜씨가 그럴 듯해 통성명을 해보면 이건 뜻밖에도 나이 어린 딸이나 손녀라고 해야 할 꼬마 숙녀인 데다 고사리 손가락으로 톡톡 받아치는 맛깔스런 입담이 할아버지 수염 잡아당기는, 마냥 귀여운 손녀딸 같았기 때문이다(이건, 순전히 나의 상상이다).

통신바둑마당에 데뷔하자마자 ‘꽃돼지’라는 애칭을 얻은 걸 보니 아마도 아이의 발그레한 두 볼에는 젖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아이는 꽃돼지라는 애칭을 얻은 그날부터 오랫동안 PC통신바둑 최고의 귀염둥이로 군림(?)했다.

입단
PC통신바둑을 통해 심청이 젖 동냥하듯(통신바둑 심청전에는 심봉사가 없다. 조숙한 심청이 스스로가 알아서 젖 동냥을 다녔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을 떠르르 울리던 임동균, 박영진 등 아마맹장들의 아낌없는 자원지도를 받은 아이의 기량은 비온 뒤 죽순처럼 부쩍부쩍 자랐고 앙증맞던 꽃돼지는 어느새 프로를 ‘꿈꾸는 초보’가 돼있었다.

아이는 ‘책을 못 보게 하려는 어머니의 작전 덕에 바둑을 배우게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운 입단절차를 밟는다. 수원의 아마강호 노근수 사범을 사사하더니 김원바둑도장을 거쳐 연구생 수업도 없이 훌쩍 프로의 벽을 넘어버렸다.

98년 한국기원 바둑연감 442쪽을 보면 제4부 부록 기록50선 최연소 입단부문에 조훈현, 이창호에 이어 세 번째로 아이의 이름이 올라있다. ‘3. 조혜연- 12세(85년 6월생, 97년 4월 24일 입단)’.

이 일을 두고는 이견이 많다. ‘어릴 때부터 아마강자들에게 고련을 받아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난전에 능하다. 조혜연 특유의 끈끈한 수읽기는 그런 바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둑을 체계 없이 배우는 바람에 초반포석이 약하고 정석변화에 어둡다. 그런데도 이 정도로 컸으니 처음부터 전문기사에게 제대로 지도를 받았더라면 한국 여자바둑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쪽이 옳다고 손을 들어줄 수도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쨌든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서 한국 여자바둑의 선두주자로 떠오르고 있으며 지나간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처럼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짓은 없다는 것이다.

국수
아이는 잘 커서 나이 열아홉의 아리따운 처녀가 됐다. 또랑또랑 맑고 큰 두 눈이나 맬빵바지에 거북이가방을 메고 팔랑팔랑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아직은 소녀에 더 가깝지만 이제 아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새천년으로 접어들면서 조혜연은 한국 여자바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됐다. 여류국수, 여류명인 타이틀은 윤영선, 이영신, 박지은 같은 선배 언니들이 먼저 차지했지만 세계최강의 여기사 루이나이웨이 9단이 한국기원 소속기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5년 동안, 루이 9단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꼽힌 여기사는 쌍두마차 박지은과 조혜연이었다.

조혜연은, 쌍두마차의 도전자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박지은에 한발 앞서 흥창배 세계대회 결승에 올라 루이 9단에게 도전장을 내밀더니 2002년에는 농심 신라면배 결승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2003년에는 여류국수, 여류명인전 도전자의 자리를 독점해버렸다. 그리고…

11월 11일 오후 5시 46분. 경주 힐톤호텔 1층 오크룸. 오전 9시 30분부터 8시간 16분간 282수까지 끌어온 기나긴 승부가 끝났다. 바둑판이 정리되고 집 수가 확인됐다. 흑(조혜연 4단)의 1집반승.

입회인 윤기현 9단과 줄곧 검토실을 지켰던 장주주 9단이 대국실로 들어섰다. 뒤이어 취재기자들과 관계자들도 따라 들어온다. 여기 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여국수 루이나이웨이 9단은 현기증이 난다는 듯 작고 가녀린 손으로 가볍게 이마를 짚는다.

도전기를 치르는 동안 감기몸살에 시달려온 여국수의 뺨은 다소 창백했고 도전자의 뺨은 아이처럼 붉게 상기돼 있었다. 여국수가 호흡을 가다듬을 때까지 도전자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린다. 이윽고 복기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서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곳을 짚어가며 선문답(禪問答)을 주고 받더니(바둑이 약한 사람들에게, 바둑판 이곳 저곳을 짚어가며 변화의 과정을 주고받는 프로들의 복기장면은 영락없는 선문답이다) 잠시 뒤에는 아예 처음부터 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8시간 16분간 사투를 벌인 두 기사의 얼굴에는 나른한 평화가 깃들었다. 곧 여국수의 자리를 내주어야 할 루이 9단의 얼굴에는 '나는 과연, 최선을 다했나'하는 아쉬움이 맴돌았고 그 여국수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 조혜연 4단의 눈빛에는 '조금이라도 더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의지가 실려있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창밖은 말끔하게 개어있었고 호텔 앞 산기슭부터 하늘 높이 여국수의 교체를 알리는 상서로운 빛깔의 무지개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떠올랐다. 우리는 요 몇년 사이에 이토록 선명한 무지개를 본 적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대국실은 알 수 없는 경건한 기류에 휩싸였고 복기는 이례적으로 1시간을 넘기고 있었다(11월 11일자 여류국수전 기사 옮김).

여기서부터 한걸음씩…
책을 떨쳐내고 바둑돌을 움켜쥔 아이, ‘꿈꾸는 초보’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프로가 되어 정한 목표가 있다면 여류국수타이틀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류국수가 마지막 꿈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우리도 안다. 이제 새길로 들어서서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충암연구회 3백단 돌파 기념 기보집은 특별한 책이다. 충암출신의 프로들이 스스로 ‘가장 인상 깊은 나의 바둑’으로 꼽은 한판의 바둑과 거기에 얽힌 진솔한 감상을 한마디씩 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는 루이 9단에게 패한 바둑을 흔쾌히(뒤의 한마디 소감에서 그렇게 느껴졌다) 올려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짧은 소감이 당시 편집을 맡았던 문용직 5단과 ‘거들어준다’는 핑계로 출간을 앞둔 원본을 눈요기하는 호사를 누린 나의 마음에 맑은 울림을 주었고 그것은 바로 기보집의 이름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한걸음씩…

그는 새 여국수가 되었다. 인터뷰가 쇄도하고 동료들은 눈웃음치며 ‘조훈현 9단이 계실 때 그 옆에 좀 있어봐. 어이, 조국수, 밥 먹었어? 이런 말 좀 해보게’라는 농을 건넨다. 그러고 보니 그도 조국수다. 웬지 초조해 보이던 얼굴에 새로운 자신감이 솟는 듯한 여유가 보인다.

기쁜가? 승부는 때때로 치통을 안겨줄 만큼 괴롭지만 정상에 선다는 것은 이렇게 좋은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 1월에는 여류명인 도전3번기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꿈의 연장이다. 희망의 휘파람이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조혜연시대’를 노래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기 이 마음만은 늘 한결 같기를 바란다.

여기서부터 한걸음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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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 2003-12-16 오후 6:03: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