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문턱, 3人3色의 바둑느낌1

겨울 문턱, 3人3色의 바둑느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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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문턱, 3人3色의 바둑느낌1

2003-11-22 프린트｜스크랩

감히, ‘그와 나 사이에는 질긴 인연의 끈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처음 바둑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곳이 바둑월간지를 발행하는 그의 후원회였고 내게 ‘바둑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한 것도 ‘그러므로 이겨야 한다’는 그의 수필집이었으며 ‘아, 바둑이란 이런 세계였구나, 바둑이라는 세계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는 경이(驚異)를 안겨준 최초의 인물도 그였다.

바둑을 어떻게 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어린시절 귀곡사나 착수금지 같은 룰도 제대로 모르면서 오로지 ‘돌 따먹는’ 재미를 만끽해본 적은 있다) 조훈현과 조치훈도 구별하지 못할 만큼 바둑에 무지했던 나는 89년 봄, 영업부 직원에게 다섯 점을 깔고 정식으로 바둑에 입문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무지하게 잘 두는 것으로 알았던 그 친구의 바둑실력은 동네에서 7 ,8급을 오락가락하는 수준이었다.

아무튼, 80년 일본기전 서열2위 명인(名人)을 쟁취해 국민의 영웅이 되고 81년 서열3위 본인방(本因坊), 83년 서열1위 기성(棋聖)을 차례로 석권하면서 단숨에 일본바둑천하를 평정했던 조치훈은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에게 85년 명인, 86년 기성을 빼앗기면서 정상에 오를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밑바닥까지 추락했는데 내가 후원회에 입사한 89년 봄부터 특유의 몰아치기를 앞세워 맹렬한 속도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입사 한 달만에 서열4위 십단(十段) 쟁취. 이때 일본기원 발행 주간지 '슈칸고(週刊碁)'는 '드디어 조가 다시 타이틀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여름엔 그 기사를 입증이라도 하듯 대삼관(大三冠- 기성·명인·본인방) 중 하나인 본인방을 추가해 3관왕에 올랐다(조치훈은 십단을 획득하기에 앞선 87년 겨울, 서열5위 '천원'을 쟁취해 '공식 7대 신문기전 제패'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일본 7대 신문기전 1회 이상 우승을 뜻하는 이 기록은 2003년이 저무는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일본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천하평정 재현을 힘차게 선언한 것이다.

조치훈이 일본에서 세운 수많은 신기록 중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일본바둑사에서 오직 조치훈만이 가진 기록으로 83년, 96~98년, 네 차례에 걸쳐 이룩한 ‘대삼관 석권’이나 89년 ‘공식 7대 신문기전 제패’ 또는 98년 다카가와 가쿠(高川格)의 본인방 9연패 기록을 38년만에 갈아치운 ‘본인방 10연패’의 금자탑을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치훈이라는 승부사 개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장 눈부신 기록은 90년부터 92년까지 이어진 숙명의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와의 ‘본인방 3년전쟁’이 아닐까 싶다.

서열1, 2위 기성, 명인의 보유자로서 ‘대삼관 통합’의 기치를 올리고 3년 동안 본인방에 도전했던 고바야시는 이 전쟁에서 참담하게 패퇴한 후유증으로 무관으로 전락하고 3년 연속 승전고를 울리며 ‘3연패 후 4연승’이라는 신기록까지 추가한 조치훈은 그 2년 뒤 고바야시를 꺾고 기성을 쟁취, 83년에 이은 ‘2차 천하평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본인방 3년전쟁의 와중에 조치훈이 흘린 말들이 마치 예언자의 그것처럼 고스란히 실현됐다는 것이다.

“올해로 3부작 전쟁시리즈가 완결된다. 이제부터 그는(고바야시) 조공(朝貢)을 바치게 될 것이다(전쟁에서 패하면 승자의 신하로 복속돼 조공을 바치는 일본 전국시대의 패권다툼에 비유한 풍자).” -고바야시가 3년째 도전해온 제47기 본인방전 도전7번기의 임전소감-

“이번에 내가 무너지면 진정한 고바야시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니다.” -제47기 본인방전 도전7번기 제1~3국 연속 패배 후 사석에서-

“아직은 그(고바야시)가 1인자다. 이번에는 사력을 다해 내 것(본인방)을 지켰을 뿐 진정한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제는 내가 그의 것(기성, 명인)을 빼앗으러 갈 차례다.” –제47기 본인방 방어 후 인터뷰중 ‘라이벌 고바야시를 꺾어 얼마나 기쁘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보기 드물게도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성공 그 이상으로 '두터운' 내면의 철학을 쌓은 사람이다. 그가 타이틀 취위식 때마다 하객들에게 나누어주는 친필 부채에 인용하는 고전(古典)의 명구들은 그의 독서량이 가볍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가 내뱉은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는 푸념은 오직 바둑일념으로 걸어온 프로기사로서의, 자신의 삶을 압축해놓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잠언으로 꼽힌다.

바둑 하나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둑이라는 작은 세계일 뿐이다. 바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치훈은, 또 조치훈이 만들어낸 모든 신화적 기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조치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잡기에 평생을 매달려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집어 말하면 일평생 오직 한마음으로 바둑 한길만을 걸어왔기에 ‘바둑은 조치훈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뜻이겠다.

그의 캐릭터는 간단하지 않다. 그는, 그가 몸담고 있는 일본 바둑계의 그 누구보다 위트가 뛰어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지만 94년 라이벌 고바야시를 밀어내고 대망의 기성에 복위했을 때 기쁨보다 우울함을 먼저 내비칠 만큼 독특한 페이소스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1인자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크게 기쁘지는 않다. 과거에는 일본의 1인자가 곧 세계의 1인자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부심이 강하지만 자기의 두 발로 서 있는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겸손한 사람이다.

그는 가식을 싫어한다. 오래 전 부산에서 ‘조치훈 초청 바둑쇼’가 열렸을 때 바둑을 잘 모르는 부산지역의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정말,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감회가 어떠십니까?’라는 의례적인 질문을 던진 기자는 그때까지 자기가 인터뷰어로서 경험한 정석대로(?) ‘가슴이 벅차고 목이 메입니다’라는 정도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조치훈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부산이 고향이라고 하지만 부모가 부산에 살고 계신 것도 아니고 철모르던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향이라는 단어에 관한 ‘특별한 느낌’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럴 경우 ‘아,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라는 정도로 기자의 요구에 부응하겠지만 조치훈은 생리적으로 그런 게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국, 기자가 생각한 내용의 인터뷰는 실패로 끝났다. 그 대가로 조치훈은 ‘향수도 없는 무지한 인물’쯤으로 기억됐을 것이다(적어도, 조치훈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 기자에게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조치훈은 한국말을 잘 못해서 한국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은 대단한 오해다.

조치훈은 인터뷰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기자들의 입맛대로 말해야 하는 가식을 싫어할 뿐이다. 또 한국말을 못하는 게 아니고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어휘나 표현에 서툴 뿐이다. 생각하는 바를 한국의 정서에 맞게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얘기다. 여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40년이 넘도록 일본에서만 생활해온 사람에게 한국의 정서에 어색하지 않게 말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일본 바둑계에서 가장 인터뷰에 능한 인물로 꼽힌다. 도전기 전후의 소감, 타이틀획득 기념식 등에서 항상 재치 있는 말로 기자들에게 ‘쓸 거리’를 제공하는 가장 즐거운 취재대상도 조치훈이다. 도쿄에서든 서울에서든 ‘조치훈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그의 솔직한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만 돼있다면 매력적이고도 다정다감한 그의 마음을 엿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92년, 지금은 사라진 동양증권배 결승5번기에서 이창호를 만난 조치훈은 ‘한발 앞서 길을 걸어온 사람의 연륜(年輪) 같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조훈현에게도 ‘우리가 이창호에게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변할 만큼 그 마음은 뜨거운 것이었으나 조치훈은 간절한 ‘그 무엇’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내용은 나쁘지 않았으나 승부의 결과는 3연패였다. 패자(敗者) 유구무언.

그가 94년 라이벌 고바야시를 꺾고 8년만에 기성을 되찾은 자리에서 꺼낸 ‘1인자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크게 기쁘지는 않다. 과거에는 일본의 1인자가 곧 세계의 1인자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한 그때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대신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가 실로 오랜 침묵을 깨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제8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결승3번기 진출. 92년 제4회 동양증권배 결승5번기 진출 이후 11년만에 올라보는 세계대회 결승무대다. 세계대회 본선의 주요고비에서 번번이 패배를 안겨주었던 조훈현을 뿌리쳤고 중국의 소영웅 후야오위를 넘어섰다.

그는 자리를 비켜준 조훈현에 대해 ‘존경하고 감사한다. 그가 없었으면 오늘의 한국바둑은 없었을 것이다. 우승후보를 꺾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고 결승에서 격돌하게 될 30년 연하의 박영훈에게는 ‘사랑스러운 친구’라고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오른 팔과 머리만 무사한 윤화(輪禍)를 당하고 무관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에도 ‘몸만 건강하면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스스로 몸을 일으켜 세운 의지의 사람이며 11년만에 그 의지를 다시 실천한 사람이다.

한국의 바둑저널은 그가 삼성화재배 결승에 오른 뒤 인터뷰기사에서 그를 일컬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은 오해 같다. 아름다운 것은 그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일생을 매달리게 한 바둑이다. 그는 오직 한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나는 그 투명한 순수를, 그 가없는 사랑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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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ot

｜ 2003-11-22 오후 3:54: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