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 그 아름다운 질주

여류, 그 아름다운 질주

Home > 컬럼 > 손종수

반상반외 ㅣ 週酒Talk

여류, 그 아름다운 질주

2003-07-07 프린트｜스크랩

아름다운 포옹

장주주(張鑄久)-루이나이웨이(藝乃偉) 부부가 한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이들 부부와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홍익동 한국기원 근처 중식당인데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화제의 중심은 루이 9단이었다. 응씨배 세계대회에서 정상급 남성기사들을 상대로 4강까지 오른 유일한 여성인 데다 한국에 오자마자 여류대회를 휩쓴 것은 물론, 세계최강 한국바둑을 이끌어온 조훈현-이창호 사제를 밀어내고 한국바둑의 상징적 타이틀 ‘국수’마저 거머쥐었으니 당연한 일.

그때 가장 인상 깊게 남겨진 기억은 둘이다. ‘팬들은 당신을 반상의 마녀라고 부르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에 서툰 한국말로 ‘저, 마녀···아니에요···’라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모습.

또 하나는 식사를 마친 후 도로변 슈퍼마켓 앞에 놓인 유리상자 안의 갖가지 인형들을 바라보던 소녀 같은 표정이다. 함께 그 모습을 보며 사람 좋게 웃던 장 9단은 두 손을 활짝 폈다가 한쪽 손을 말아쥐며 역시 서툰 한국말로 ‘집에···피프틴 있어’라고 말했다. 루이 9단은 크레인으로 인형을 건져올리는 이 게임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렇게 해서 이들과 한가족이 된 인형이 열 다섯이나 된다는 것.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루이 9단은 결코 미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의 가슴에는 분명, 이런 울림이 있었다. ‘참, 아름답다!’.

장, 루이 9단은 부부라기보다 오누이 같고 친구 같다. 오랜 유랑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함께 겪으면 그렇게 되는가. 이들은 기꺼이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지만 처음부터 한국에 정착할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장-루이 부부가 프로가 없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둥지를 틀고 싶어했던 곳은 ‘영원한 우상’ 우칭위엔(吳淸源) 선생이 계시고 생활환경이 나아보이는 일본이었다.

그러나 일본 바둑계는 냉담했다. 어느 자리에서나 친절한 대접을 받았으나 간절하게 바라던 일본에서의 프로생활은 단호하게 거부당했다. 우칭위엔, 린하이펑(林海峯), 조치훈을 받아들였던 일본이 이들을 차갑게 외면한, 가장 큰 이유는 루이 9단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었다.

‘루이 9단을 받아들였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중국에 눌려있는 일본여류바둑이 영원히 중국을 극복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일본 바둑계에 팽배했고 무엇보다 이해당사자인 일본 여류쪽에서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장-루이 부부는, 일본정착에 실패하면서 마지막 희망이 돼버린 한국에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프로들의 생활환경도 일본보다 나아보이지 않았고 당시로서는 한국 여류바둑의 수준도 일본보다 높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꿈의 실현은 언제나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법. ‘프로무대에서 바둑을 두고 싶다’는 이들의 간절한 염원은 마지막 모색처였던 한국에서 열매를 맺었다. 한국기원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세계바둑의 거인 조훈현 9단과 미국에서 교분을 튼 차민수 4단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지만 이들의 한국정착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여류들의 찬성이었다. 짧은 이력의 소녀들이 주축을 이룬 한국여류바둑이 그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아름다운 포옹이었다.

아름다운 질주

루이폭풍은 예상보다 훨씬 매서웠다. 루이는 한국에 둥지를 틀기가 무섭게 모든 기전을 휩쓸기 시작했다(심지어는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국수전까지도). 투톱 윤영선-이영신은 물론, 그 뒤를 이은 여류바둑의 희망 박지은, 조혜연마저 속속 무너졌다. ‘이러다가 크기도 전에 주눅이 들어 영영 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가 나돌고 강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는 일본여류들이 단호하게 루이를 거부했던 일이 현명한 판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기꺼이 세계최강자를 받아들인 한국 여류들은 슬기로웠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무너지는가 싶더니 갈수록 박빙으로 어울리는 승부가 많아졌고 새로운 투톱으로 자리잡은 박지은-조혜연은 한발 더 나아가, 간간이 폭풍을 뚫고 정상의 햇살을 음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 여류바둑은 21세기를 맞아, 그동안 키워왔던 가능성들을 하나, 둘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새로운 투톱의 기세에 조금 밀려나있던 큰언니 윤영선 3단이 제1회 하오줴배 우승으로 한국 여류바둑의 숙원이었던 세계제패를 이룩한 것은 상서로운 징조(비록, 루이 9단이 출전하지 않은 대회이긴 하지만).

이지현(여류국수전), 현미진(여류명인전) 2단의 이름이 새롭게 도전무대에 걸리고 신투톱의 눈부신 활약이 그 뒤를 이었다. 도요타덴소배에서 일본의 에이스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을 격파해 한국여류의 매운맛을 보여준 박지은 3단은 이벤트대국이긴 하지만 최강 루이 9단과 맞서 대등한 기량에 올라서있음을 입증했다(최종결과에서 루이 9단을 정선으로 밀어냈지만 ‘박지은이 루이를 압도했다’는 일부 평판은 공감하기 어렵다).

박지은 3단이 루이 9단과 대등하게 겨루며 급성장한 한국 여류바둑의 기량을 입증했다면, 한국 여류바둑의 장미빛 미래를 가장 확실하게 예고해준 기사는 조혜연 4단이다. 박지은 3단과 함께 유이하게 ‘루이를 넘어설 재목’으로 주목돼온 조혜연 4단은 지난해 정상급 강자들을 연파하며 농심 신라면배 대표선발전 결승진출(권효진 4단에 이어 두번째)이라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고 상반기를 넘어선 올해까지 그 눈부신 질주를 이어가고 있다.

7월 7일 현재 조혜연 4단의 성적은 19승 10패. 191명의 프로기사 중 다승 21위, 승률 25위(66%)를 기록하고 있다. 정상과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자랑해도 좋을 여류 최고의 성적이다. 세계최강의 신예들이 군집을 이룬 한국 프로무대에서 여류기사가 이 정도의 기록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99년 승률1위(33승 6패 84.6%)를 기록했던 루이 9단이 현재 17승 12패로 다승 28위, 승률 49위(59%)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조혜연 4단의 기록을 좀더 세밀히 살펴보면 그 내용이 더욱 값진 것임을 알게 된다. 총 29국 중 대 여류기사전은 9승 2패인데 올해 여류명인전 도전무대에서 루이 9단에게 당한 2패를 제외하면 전승을 거둔 셈이다. 조선일보 이홍렬 기자는 ‘내 생각엔 조혜연 4단이 루이 9단에 이어 여류랭킹 2위다. 여류명인전에선 패했지만 나날이 힘이 붙고있어 이제는 당장 맞붙어도 5할승부라고 본다’며 '조혜연 대망론(大望論)'에 힘을 싣는다.

총 29국을 겨뤄 19승 10패. 그중 여자들과 겨룬 기록을 빼면 남자들과 18국을 겨뤄 9승 9패의 호각을 기록했다는 얘기가 된다. ‘대진운이 좋았겠지’라는 상상은 접어주시길 바란다. 5단 이하의 기사들이 통과해야 하는 1차예선 1, 2회전은 세계최강의 신예들로 촘촘히 짜여진 ‘지옥의 저인망(底引網)’이라 실력이 없으면 속칭 ‘단칼멤버(1차예선 1회전에서 탈락하는) ’가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조혜연 4단이 대 남자기사전에서 9승 9패의 호각을 이루는 데 제물이 된 강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속기의 달인’ 서능욱 9단, 신예최강그룹의 리더 조한승 5단, 왕위전 본선멤버 박정상 3단, 입단 초기부터 돌풍을 일으킨 강동윤 2단 등 어느 한 사람도 적당히 행운으로 넘어설 상대는 없다.

조혜연 4단의 눈부신 성장과 일천한 역사를 가진 한국 여류바둑의 비약적인 발전은 그들 스스로 쌓은 공덕에 의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일본의 여류들이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보호받아온 반면 한국의 여류들은 의연하게 ‘온실의 화초’가 되기를 거부했었다(한국기원에서는 여자 기사들의 승단이 늦어지자 여자 기사들끼리 치르는 승단대회를 제안한 바 있는데 단호하게 그 유혹을 뿌리쳤다). 그런 건강한 정신이 있었기에, 일본에서 외면한 루이 9단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자랑스럽다. 스스로 당당한, 야생의 향기를 가진 한국의 여류, 그 아름다운 질주가 더 힘차고 빠르게 이어지길 바란다.

사족 하나,
몇 개월 전 정관장배 4강전에 출전했던 권효진 4단의 인터뷰 내용이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는 여류기사가 많다. 그런데 인터뷰는 거의 박지은, 조혜연 3단만 하고 내용도 전혀 딴판이다. 두 사람에게는 승부에 관련된 것들을 묻지만 다른 기사들에게는 신변잡사를 물어볼 때가 더 많다. 이번 개막식 때도 나한테는 ‘부녀기사’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장쉔 8단을 상대로 어떤 각오로 임하는지, 승부에 관한 것은 전혀 묻지 않는다.”

‘섭섭하지만, 실력이 약한 기사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말을 맺었지만 ‘실력이 약하다고 해도 고르게 관심을 가져줘야 여류도 발전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 프로는 팬들의 관심과 성원으로 발전하는 법이다. 우리는 그동안 자랑스러워 해야 마땅할 한국의 여류들을 외모로만 점수 매김하면서 정작 홀로서기를 향한 꾸준하고도 가열찬 노력은 적당히 폄하해온 것이 아닐까(나 역시 그 혐의를 벗어날 자신이 없다).

한국여류바둑의 첫장을 연 윤희율(은퇴), 조영숙 사범님 그리고 이땅의 여류바둑의 발전을 위해 힘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전 다음 목록

┃꼬릿글 쓰기

이병주

｜ 2003-07-25 오후 11:57: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