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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손으로 둔다는 거, 그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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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손으로 둔다는 거, 그것에 대해서
2013-02-15 조회 11805    프린트스크랩
▲ 조남철시대부터 이창호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승부사와 영웅이 탄생하 고 스러지면서 가로세로 361로 바둑세계의 역사가 수놓아졌다. 본 칼럼은 이 러한 바둑사의 한 구비 정리가 아니라 미래를 준비해야할 시점에서 던지는 새로운 화두이다. (일러스트/월간바둑 표지)




 

<글을 마치면서> 

 

1. 쓰게 된 이유와 감사의 인사

 

2011년 봄, 최규병 기사회장이 바둑사를 한 권 쓰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잠시 멀뚱했다. 답했다. , 그거 필요하지만 힘든 건데.... 그거 할 힘이 없네.

 

1년 반이 지났는데, 뭔가가 들어왔다. 쓰지는 못하더라도 바둑사를 이해할 만한 주제나 관념에 대해서는 약간 살펴보면 좋겠다, 그런 맘이 들었다. 결정이 먼저인지, 아니면 내용의 일부가 머리에 떠올라 결정을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역사는 다루기 힘든 분야다. 역사서를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에 겹고, 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둑에만 국한한다면, 바둑을 모르고 바둑사를 쓴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바둑, 또는 바둑의 세계를 좀 안다고 해서 바둑사를 다룰 수 있다고 한다면 이 또한 오만이다.

 

혼자 할 수도 없고, 약간의 지식만 믿고는 손도 대기 힘든 것. 자료만 모아서 될까. 어렵다. 자료를 모으는 기준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 기준을 가질 수 있는 안목은 역사 전공자가 아니면 이론적으로도 갖기 힘든 것. 한편, 이론과 자료의 안목을 지닌 훈련받은 역사학자라도 그가 바둑을 모를 때엔?

 

그러니 이 글이 취한 태도는 약간의 꾀부림이었다. 다루고는 싶은데 본격적인 바둑사를 쓸 힘은 없다. 어떡하나? 방법 하나는 목표를 낮추는 것이었다. 곁가지를 다루자. 이런 저런 곁가지를 여남은 개 다루면 줄기는 없더라도 전체 나무의 윤곽은 실루엣으로라도 잡을 수 있겠다. 그것이었다.

 

충분치 못했다.

 

우선 다루어야 할 주제를 충분히 포괄하지 못했다. 바둑교실은 물론이지만 기사회의 구성과 성장에 대해서도 조명할 필요가 있었고, 애기가의 사회경제적 인구학적 기반이야 더욱 절실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은 다()맥락적인 문화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둑의 (상징적) 속성과 어떻게 부합되는지, 또 그것이 세대 간에 차이가 없지 않은지도 검토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자료도 충분치 못했다. 월간지나 신문에는 바둑사를 정리하기에 충분한 자료가 쌓여 있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한국기원이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준비해둔 육성 녹음도 있었고 선배 동료들의 기억과 회고도 넉넉히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게을렀다.

 

부족할 때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래, 스스로에게 들려준다. 부족할 때 만족하라. 아쉽고도 부족한 만족과 함께 여러 희망도 남겨본다. 바둑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논문으로 다양한 주제를 조금씩 조금씩 다룬다면 그것이 모여 제대로 된 바둑사를 이루는 큰 힘이 될 것이다. 그 속에는 이 글이 미처 눈길 주지 못한 수법의 변천사도 들어갈 것이다.

 

관심만 가졌지, 알지 못했던 바둑과 다방, 그 주제도 희망한다. 풍속사에 관심 있는 누군가가 쓴다면 그 얼마나 좋으랴. 다방. 바둑 못지않게 알고 싶은 세계. 도서관에 가면 이미 누군가가 연구한 꽤 잘 된 논문이나 책이 있을 법한데, 도서관에 앉을 노력은 아니 했다.

 

그렇다. 바둑은 바둑 주변을 알아야 알 수 있는 세계다. 다방의 문화를 모르고서 60년대 이후 80년대까지의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2013년 현재의 한국사회, 그 문화와 시대상을 모르고서 오늘의 바둑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알고 있다. 바로 이 글이 그러한 한계를 안고 있다.

 

사실 역사에 문외한이 바둑사를 다룬 것은 부적절했다 하겠다. 애초의 예상보다 보수적인 이해도 많이 가진 이 글이, 그러나 자극제가 되어 앞으로 본격적인 바둑사가 나오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또 한국기원과 바둑협회의 정책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넓은 시야의 글을 기다린다.

 

부족한 글 얼른 마치는 변명이기에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먼저, 공감해주고 질정을 마다않은 독자에게 감사드린다. 질정 주신 말씀 거의 대부분을-아니 거의 모든 것을-이 글도 동감하고 있음을, 늦으나마 말씀드린다.

월간지 PDF파일을 전해준 명지대 김진환 교수와 사이버오로, 사진을 찾아주고 내용에 틀린 점을 보완해 준 사이버오로의 정용진 이사, 그리고 자료의 수집을 도와준 한국기원의 김종열 부장과 구기호 편집장에게도 감사드린다.

 

 

2. 공감이라는 거, 승부라는 거

 

바둑이란 어떤 세상인가. 우린 바둑에 어떻게들어가나?

2년 전, 우연히 반상을 보면서 형상과 은유를 떠올렸다. 순간 아차 싶었다. 왜 그동안 이 세계를 미처 접하지 못했을까. 한심하기도 했으나 은유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당연도 했다.

 

바둑의 본질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은 반상이 모호한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린 우리 신체(의 은유)를 통해서 반상을 붙잡는다. 그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의미를 얻는 것을 일러 소위 포착한다고 하지 않던가. 포착(捕捉). 붙잡고 붙잡는 것. 그렇다. 우린 손으로 잡는 방식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반상에서 우린 손을 통해서 참여한다. 그러나 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 사용하는 것은 온 몸이다. 예를 들어, 두점머리 두드릴 때 손맛으로 두드리는가? 아니다. 기분으로 두드린다. 몸 어디선가 느끼는 쾌감으로 두드린다. 손은 현실이자 은유이다.

 

빵따낼 때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 따내는 행위와 따낸 다음 반상에 남겨진 흔적, 그 공간. 그것은 머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물론 머리로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 경우엔 건조하고 메마르다. 종이 위에 놓인(씌여진 것이 아니라) 문자를 상상력 애써 죽이면서 읽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모티프 한국바둑사를 쓰면서 사용한 단어를 몇 개 돌아본다.

 

은유, 공감, 정서, 참여, 개성, 혼돈, 자유, 5시간, ...

승부, 공정성, 단체, 10, 초읽기, 선수, ....

 

몸이 달리 반응한다. 달리 감응한다. 첫째 줄에서는 감응하고 반응하지만, 둘째 줄에서는 반응하거나 감응하지 않는다. 바라본다. 거리를 둔다.

 

그 차이.

2000년을 전후해서 한국바둑계가 접한 두 개의 세계.

돌아서려 했던 세계와 가지려 했던 세계.

그 세계들의 차이다.

 

가벼운 회고나 추억에 그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시대를 거스를 수 있는가, 하는 식은 문제를 비켜가는 것이다. 우린 바둑에서 만날 수 있는 두 개의 세계를 대비하고 있다. 글의 초점은 그것이다.

 

우리는 바둑이란 세계에 은유로도 참여할 수 있고 분석으로도 만날 수 있다. 감응할 수도 있고 바라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린 두 개의 세계 중에서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기에 최근 바둑이 지나치게 승부 위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아쉬움 이상으로 탄식했다.

 

왜 승부였던가? 단순히, 시대의 변화가 단선적이고 파편화된 양식을 찾아 나선다는, 그래서 바둑도 그리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그런 고만고만한 철학으로 뭉뚱그리고 싶지는 않다. 그런 거창한 거시 이론적 야심도 어느 정도야 필요하지만, 60년 정도의 현대 바둑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런 이론까지 나서는 것은 너무 과하다. 그런 거시적인 안목은 적어도 수백 년을 다룰 때에야 약간의 쓸모가 있다.

 

승부는 최근의 선택이었다. 물론 승부를 초점으로 하지 않은 바둑은 없었다. 그런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승부를 포괄한 바둑과 승부만의 바둑은 다른 것이다.

 

최근의 승부는, 은유나 상징, 개성, 감성, 신화 등을 내던지면서 얻은 선택이었다. 최근의 승부 위주 세계는, 사회의 점진적인 변화로 인해 우리가 의식적으로 억제하거나 조절할 수 없었기에 갖게 된 것이 아니다.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반상. 그리고 그 속에서 손으로 신체로 감성으로 반상에 젖어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대가 점점 더 놓치게 되는 바둑의 속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린 스스로 잠기던 은유를 단숨에 던져버리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외의 입장에 서 있다.

 

단순하게 증거할 수 있다.

 

상징, 신화, 공감, 참여, 기풍, 개성... 이런 것이 승부와는 별개인가?

아니다. 이들은 승부를 포괄할 수 있다.

그러나 승부는 그들을 포괄하지 못한다.

 

인간은 맥락 속에서만 비로소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맥락이 사라지면, 공허를 메우는 중독 외에 달리 길은 쉽지가 않다. 신화와 은유, 공감과 참여, 기풍과 개성... 이런 것이야말로 맥락을 안겨주는 것이다. 바둑이 삶의 맥락에서 왜 멀어져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3. 서술의 한계를 반성해본다

 

대체로 관심과 도구 자체가 내용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이 글이 그랬다.

 

주제가 천재, 강박, 신화, 개성, ()와 기(), , 관철동, 기원 등이었는데, 주제의 은유적 개성과는 달리, 나누다보니 분석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나누어서 추상적으로 설명하려고 했지, 개별적인 현장은 놓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포착되지 않는 것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고 추적하기 힘든 것은 피했다. 예를 들어 여성은 다루었지만, 경험의 생생한 현장을 다루는 데에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미처 균형 잡지 못한 현장을 몇 개 소개해보겠다.

 

일반적으로 여성기우회의 활동상에는 자체 열리는 대회도 있지만, 자선을 위한 일일찻집이나 다른 기우회와의 교류전도 없지 않았다. 그런 사회적 활동은 여성들의 바둑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활동은 풍속을 알려주는 정도에서 그 가치가 그쳐야 할까? 그를 알기 위해서는 바둑을 배우려는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알아야 하겠다.

 

여성들의 경우 이미 72YMCA에서는 어머니 바둑클럽을 개설해서 아기엄마들로부터 크게 환영받고 있().”(바둑1972. 8) 초점은 공공적인 인상(印象)의 기관이 나섰다는 것인데, 당시 여성들이 기원에 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건 조영숙 초단이 인기리에 연재했던 월간바둑여성살롱코너에서도 자주 등장한 주제였다. 바둑을 배우려는 친구는 한국기원 여성기우회실로 인도한다고 했다. 그곳이라면 마음 편히 바둑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여성회원실 401호는 언제나 여성만을 위하여 열려 있습니다.” 이 안내문은 바둑에 자주 등장하는 일종의 광고였다.

 

그렇다면 추적해야 했다. 대체 여성들은 어디서 바둑을 배우고 또 두나? 몇몇 자료가 잡힌다.

 

바둑을 쭉 살펴보면-이거 고생한다.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들쳐보아야 한다. 목차도 있고 하다보면 요령도 생기기는 하지만 통계자료 모으는 거 못지않은 피곤이 온다-“단발머리 여류기사, 동덕여중을 찾아서와 같은 흑백사진을 만날 수 있다. 바둑(1978.12)에 실린 것인데, “바둑을 두는 아가씨들이라는 제하의 탐방기사였다. 41개 특별반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러나 7교시 특활시간 1시간에 그친다 했다.

 


월간바둑 1978년 12월호에 실린 동덕여중 바둑특활반의 수업 모습.

그랬다. 여성들은 제한된 공간 속에서 배웠다. 사회와 약간은 거리를 둔 공간에서 배웠다. 몇 몇 사실들로 보강해보자.

 

바둑(1981.11) 흑백화보는 알려준다. 조영숙 초단이 서문여고 바둑부 강사로 나가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진을 보니 아주 초보, 그러니까 입문반을 가르치고 있다. 803월에 만들어지고 81911일부터 조영숙 초단을 초청해서 배운다. 1부터 고3까지 80명이 수강한다.

 

같은 책에서 마산 제일여고가 바둑부를 창설한 것이 803월임도 알려준다. 회원은 68. 마산에 거주하는 박진열 4단에게 특별강의를 한 번 요청할 때의 사진이 실려 있다.

 

놀랄 만한 소식도 있다. 198312바둑, 1027일에 무려 2,700명이 참가한 교내 바둑대회를 연 협성(協成)여상을 소개하고 있다. 중간 화보로 실린 사진이 압도적인 광경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분산해서 두었던가 싶다. “가을 바둑 운동회란 기사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가슴에 노랑리본을 단 여학생들이 학교 앞 골목 입구에서부터 상냥하게 안내를 했다.”

 

대체로 여성들은 그런 루트를 통해서 바둑을 배웠다. 바둑(1983. 12)에 보면 제1회 전국 여학생 바둑대회의 참가자 자료가 있다. 초등(29) 중등(49) 고등(32) 110명이 대회에 참가한 것인데, 충암여중에서 40, 서문여고 바둑부에서 24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남학생의 경우와는 달리 학교 차원의 배려 없이는 바둑 배우기 힘든 거 아니었나 싶다.

 

그런 사정을 모두가 안다. 그래서, 놀란 당시 주최자 고려투자금융()은 입상자 전원에게 파격적인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여성들의 배움에는 확실히 어려움이 컸다. 남성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현재 바둑TV의 시청자 20%를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디서 왔을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90년대 말에는 전체 바둑인구의 9.7%를 여성들이 점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교에서 특활 정도로 배워서야 그런 수준에 오를 수가 없는 것.

 

답은, 80년대 초부터의 어린이 바둑교실에 있다.

 

71년부터 어린이국수전을 개최하긴 했지만, 그러나 어린이들이 바둑을 체계적으로배운다는 것은 바둑계가 미처 예상할 수 없었다. 비록 바둑의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특히 조치훈의 명인 획득 등 국민의 인식을 크게 바뀌게 하는 사건도 있었지만, 80년대에 들어와 어린이들의 바둑 열기는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80년대 초 최초의 어린이 바둑교육이 사설 기관에서 행해졌다. 70년대에 특활을 하는 초등학교가 두셋 있었지만, 사설은 없었다. 대표적인 어린이바둑교실로 꼽히는 수양바둑교실은 현재(83) 수강인원이 70명 수준이고, 2년 동안 거쳐 간 아이들이 400명을 넘는다 했다. (바둑(1983.9) “자리잡는 조기교육, 소꿉바둑의 현장, 수양바둑교실”)

 

 

83년 당시 서울에 30여 개가 넘었던 바둑교실은 전국적으로 많을 때에는 1천 개를 헤아렸다. 물론 수양바둑교실이 당시에는 다른 교실보다 컸지만, 나중엔 학생이 100명 넘지 않는 교실이 별로 없었다.

대충 어림해보자. 수양바둑교실이 1년에 200. 그러면 1년에-교실이 가장 많을 때에-20만 명이 어린이 바둑교실을 거쳐 간다. 10년이면 200만 명. 이제 30년이 지났으니 2030년이면? 실로 대단한 숫자다. 모두가 다 바둑인구로 남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짐작할 수 있다. 여성 바둑인구는 아마도 이로부터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성들의 바둑 참여는 80년대 초에 기회가 주어졌다. 80년대 초 대현출판사에서 어린이 바둑숙녀바둑을 펴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추상적인 개념은 중요하다.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놓쳐버리기 쉬운 무형의 세계를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실제의 경험 세계를-추상적인 언어와 결합되지 않은 한계에 들어있는-파악하지 못하는 단점도 작지가 않다.

 

역시 그렇다.

주제 자체가 모티프한국바둑사였다. 그러고 보니 이런 현상 있었다.

 

1) 자신도 모르게 추상적 관념에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2) 관념과 이론이 현실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3) 현실에서의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살아있는 현상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1) 전체 바둑사를 관통하는 주제를 찾으려는 경향 있었다. 역사 전체를 아우르고 싶은 욕심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추상적인 관념에 경도되곤 했다. 천재, 시스템, 강박, 영웅, 공정성, 그런 것이다.

 

2) 관념이 현실을 이루어나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처 관념에 잡히지 못한 현실도 있다. 바둑문화의 기초가 그 중의 하나인데, 기원과 출판사, 바둑교실, 여성 바둑의 현장, 직업별 바둑 클럽 등을 들 수 있겠다. 관념을 중시하다보니 많은 현실을 놓쳤다.

 

3) 제한된 것만 보았다. 살아있는 자료를 찾고 개성 있는 자료를 붙잡아 삶과 문화의 전개를 깊고 넓게 그리는 것은 능력 밖이었다. 제한된 수준의 서술로만 그쳤던 것은 글의 한계로, 인정한다.

 

출판사를 탓하기도 했는데, 탓보다는 고마움을 먼저 가져야 했다. 법문사, 현현각, 육민사, 이상사. 창원사, 양우당, 대현출판사 등 많은 출판사가 바둑책을 발행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잘 할 때도 있었고 못 할 때도 있었다. 실패했더라도 출판사의 역할은 중요했다. 실패했더라도 주간바둑신문의 역할은 컸다. PC통신과 인터넷의 발전 과정에서 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간 사업가들의 인생을 건 비용도 놓칠 수 없다.

 

책 차원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명멸해간 여러 출판사, 여러 기업들의 노력을 이 글은 간과했던 것이다. 12번째 글에서 책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기원을 초점으로 잡아 아쉬움을 표현한 것도 좁은 식견이었다. 출판사들의 성쇠를 이해해야 했다,

 

넓어지려고 했으나 그럼에도 관점이 한국기원 주변을 돈 탓이 컸다. 기원과 바둑교실 등 바둑 성장의 현장에서 살아온 분들의 안목을 얻었어야 했다. 자주 있었던 것으로, 19795월호 바둑한국기원에 바란다는 제하에서 6명의 기자들이 정책적 제언(提言)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바로 이 글이 놓친 그런 말씀도 있었다. 입장이 다르면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기자들만큼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도 없다.

 

개인 차원의 활동도 인식하지 못했다.

 

19767월호 바둑엔 해산 장대섭씨가 도서를 기증하는 흑백사진이 있다, “한국 기계 발전에 남몰래 공로가 많았던 해산 장대섭씨가 또다시 2백여 권의 바둑관계 장서를 한국기원에 기증했다.”

 

19785월호엔 우리 기단의 뿌리라는 제하로 그 첫 번째, 권재룡 박사를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두 번째는 이학진, 세 번째 신호열, 네 번째 최태열.)

 

당시 권재룡 박사는 3년 전 경남 고성에 정착했다. 아는 분은 다 알다시피, 권재룡 박사는 당시 바둑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오랫동안 큰 언덕이 되어주었다. 바둑은 굳이 형용사를 쓰지 않았다. 담담한 소개.

 

많을 때에는 24명까지 모였다. 숙식과 차비, 자유. 그것이 주어졌다. 리그전 우승자에겐 상금도 주었다. 일본 신문관전기 스크랩은 물론이고 전문적인 일본책을 많이 구비해놓았다. 그 외에는, 리그전을 끝낸 날 여럿이, 골목 안 옥호(屋號) 없는 선술집, 동태찌개와 막걸리, 추운 겨울밤. 만났던 사람들의 삽화들이다.

 


월간바둑 1978년 5월호에 소개된 권재룡 박사와 동산의원 


 

동산의원 4층 팔각정 방, 그 한쪽 벽에 전적표가 붙어 있었다. 뜻은 별달리 없겠지만, 그래도 당시의 분들께는 선물이 될 듯도 하다.

 

77년도 종합성적

---------------

1() 박상돈(13372)

2 강만우(41/26)

3 정대상(135/88)

4 임선근(165/113)

5 신영철(42/31)

6 권재룡(95/93)

7 제정제(114/127)

8 박영렬(35/40)

9 박수현(88/101)

10 이계훈(16/18)

11 김기헌(133/170)

12 조병탁(10/13)

13 장명환(52/70)

14 박성균(29/44)

15 이상식(15/23)

16 이용호(3/5)

17 유경남(24/38)

18 최진복(8/19)

19 이학용(2/5)

-----------------

 

특이한 풍속도가 하나 있었겠다. 70년대 말의 자화상 하나. 바둑의 풍속도는 중요하다. 하나만 그릴 수 있다면, 그 전후해서 10년 정도는, 바둑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겠다.

 

서술의 한계도 이제 매듭짓겠다.

 

글이 공감과 정서, 이해와 참여, 삶의 현실성 등을 지향하긴 했다. 그러나 분석하려는 태도가 강했던 탓에 특히 유머가 부족했다. 단지 바둑사라는 것이, 이런저런 주제, 관념, 여파, 이해와 오해로 이루어진 강()과 같다는 것을, 보는 정도였다.

 

다행한 것은 역사학자로서의 훈련을 아니 받았다는 것이다. 받았다면 훨씬 고생했을 것이다. 제대로 다룰 안목이 있을 테니, 그러면 그에 비례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혼자 할 일이 아님을 절감했다.

 

 

감사!

 

20132월 문용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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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야옹 |  2013-02-15 오전 9:52:4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타령 |  2013-02-15 오전 10:00:3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문용직 박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겸손하게 쓰셨지만 많은 시사를 준 훌륭한 글이었습니다.  
高句麗 |  2013-02-15 오후 12:23:2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이런걸 시사프로그램이라고 하나?
이런 시사프로그램 적인 글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이런글을 원간 바둑에 실는다고 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좋은 내용의 글입니다
그러나 월간바둑은 이런 좋은 내용의 글을 실을 공간이 없읍니다
이유는 월간바둑 종이를 고급지로 바뀌면서 페이지수를 대폭 줄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문화면에서 몇개 추가했지만  
하이디77 한가한 프로 사범님에게 수법의 변천사라는 제목으로 일 좀 맡기세요. ^^*
하이디77 |  2013-02-15 오후 12:51:1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문용직 사범님에게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나마 한국기원도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에 감사드리게 되네요.
모두 힘내서 몇걸음 전진해 봅시다. ^^*  
조명인님 |  2013-02-15 오후 4:31:1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오랜 만입니다. 이런 맛깔스러운 글 자주 볼 수 있길 바랍니다. 기계(棋界)에 묻혀있는 사연들이 많을 겁니다. 기억을 더듬고 자료도 찾아서 꼭 좋은 책으로 펴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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