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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棋士)의 정체성, 바둑 성장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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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棋士)의 정체성, 바둑 성장의 기초
2013-01-18 조회 10952    프린트스크랩
▲ 대주배 2년 연속 우승으로 기사생활 하반기에 타이틀과 인연을 맺고 있는 서 능욱 9단. 반상의 손오공으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그도 한때 내기 바둑의 유혹에 시달렸던 시절이 있었다. 사진은 김인 9단과의 최강자전 도전 자결정국.1979년. (자료사진/월간바둑)

 

 

1. 기사 정체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분야의 개척자는 대개의 경우 삶이 고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삶은 여러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역사로 의식으로 꿈으로 살아남는다. 바둑에서도 그러하다. 그 중에서 주목할 것은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다. 바둑 초창기의 기사들이 바둑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것은 곧 기사의 정체성이자 바둑의 정체성이었다. 그것이 사회적 인식과 연결될 때 비로소 바둑의 가치는 형성되었다.

 

바둑의 가치가 주어질 때 기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역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만큼 사회에 가치를 요구할 수 있다.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느냐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1964년 프로가 아마와 분리될 때 프로들이 가졌던 기사 정체성은 어떠했던가.

2010년을 넘어선 지금은 어떠한가. 그 정체성의 변천과정은 곧 바둑의 사회적 가치의 변천과 매우 밀접하기에, 우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60년대 바둑은 스스로 자신을 기예(技藝)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둑은 2000년대 초 스포츠로 정체성을 방향 잡았는데, 그 간극 때문인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바둑은 기예(技藝)의 측면과 스포츠의 측면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기사 정체성은 혼란되기 쉽다.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기사는 무력해지기 쉽다.

 

정체성은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

상징적인 자아가 없이 어떻게 자신의 이름과 자신을 하나로 볼 수 있는가? 자아를 말해주는 에고는 불쾌한 것이 아니다. 적절한 에고와 자아정체성은 삶에 필요한 것이다. 직업의 정체성 또한 삶에 건전한 힘을 제공한다.

 

정체성은 중요한 바로미터다. 그 자체가 존재의 확인이기도 하지만, 직업과 개인적 삶의 건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돌아보면 60년대에도 이미 기사들에게 직업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컸다. 정창현 6단의 고뇌를 보자.(바둑1972.9)

 

(대담자) 우리는 너무 신문기에만 의존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기사들의 활동도 그렇고, 수입면에서도 그렇고. .

 

() 그렇습니다. 그네(일본)들은 기사가 그야말로 직업으로서 확립되어 있어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도 상당히 높은 편이지요.

 

(대담자) 특별한 계획 같은 것은 없는지?

 

() 무엇보다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습니다.

 

자세가 아니 되어 있다? 자신이 기사로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정체성을 뚜렷이 자긍하기에는 현실의 여건이 많이 어렵다는 것이다.

 

 

기사의 정체성 확인에서 사회적 도덕률은 중요하다. 사례를 하나 보자. 서능욱 7단이 밝힌 것이다.(바둑1984.1)

 

사리분별이 어려운 때에 바둑 한 번 두라는 제의가 왔다. 일명 내기바둑이었다. 생활이 어려운 것을 알고 내기바둑계에서 소위 스카우트하러 온 것이었다. 수입도 없고 해서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과 기사가 내기를 두어서 되겠느냐 하는 갈림길 속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바둑 두며 알게 된 임창식 형이 부산에서 올라왔다. 당시 임창식 형은 아마추어 강1급이었다. 사정을 알고는 나더러는 내기를 두지 말라고 애정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겠다. 시절이 어려운 때-서능욱은 1972년 가을에 입단했다-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은 누구라도 쉽지 않다. 사회적 제도가 갖추어지면-전문기사제도-그에 걸맞은 태도와 도덕률이 요청된다. 잠시 그의 재능을 보여주는 바둑 하나 살펴보자.

 

1(넓히고 붙여서 어지러운 것이 바둑)

이거 참, 해설하기 힘든 내용이다. 서능욱의 감각은 워낙 탁월하고 수읽기 빨라서 따라가기도 힘들다. (198419기 왕위전 리그. 9단 김인 : 7단 서능욱)

▼ 서능욱의 재능

 

5 이후의 수순은 <1-1>.

 

   

2. 기사 정체성의 확립 과정

 

한국 바둑에서 프로의 정체성은 언제 확립되었을까?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확립되었다고 보여진다. 1981년 바둑에 대한 적용법이 공연법(흥행물을 대상으로 하는)이 아니라 문화예술진흥법(창작예술활동에 관여하는)으로 바뀐 것을 크게 기뻐했던 것이다. 주무부서도 문공부 공연과에서 문화과로 이관되었다.

 

당시 중국이 기예원(棋藝院)을 체육회 산하에 두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것도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바둑을 체육으로 생각한 흔적은 당시엔 없었다.

 

몇몇 중요한 현상을 시대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1) 1960년대 - 프로와 아마의 구별 - 전문기사 제도 확립

 

1964년에 프로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프로였던 사람들 중 일부가 아마로 전향했는데 그들은 프로에 대해서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거 같지는 않다. 그래서인가, 19655기원(棋苑)을 보면 프로 2단이었던 강철민 2단과 아마 4단이었던 홍종현 4단의 대국에서는 아마추어가 먼저 두지만 덤을 5집 공제하는 형식으로 두어졌다.

 

2(아마추어가 덤을 공제하다)

이름부터가 아마가 먼저 나왔다. 전문기사의 정체성은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었음을 알겠다. 다만 프로는 한자, 아마는 숫자로 단위를 구별했다. (1965기원주최 아마프로대항전. 단 강철민 : 4단 홍종현)

1이 좋은 수. a에 두면 백b로 우변이 좁아진다.

▼ 아마-프로 대항전

 

3 이후는 대문자 <2-1>.

 

3(아마 톱 클래스의 관록)

1, 3이 가장 현명했다.” 해설에는 놀랍게도 흑2가 악수라는 이해가 없다. 요즘 보면 흑2는 아마추어들도 잘 두지 않는다. 2 다음 귀의 침입까지 허용하면 백1, 2 교환이 흑에게 손해라는 이해가 널리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보 수준과 실력을 짐작할 수 있겠다. 2A 또는 B로 대응하는 것이 좋다. (1967바둑세계신예프로아마대항전 제3. 5단 김규태 : 初段 염찬수)

 

언제나 지나간 시대는 뒤에 오는 시대의 안목에 비하면 부족하다.

그건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60년대 당시의 안목으로 볼 때 구한말 국수들의 수준은 아마추어에 불과했다고, 조남철 선생이 말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 전문기사들의 직업 정체성은 매우 허약했다. 그것은 자세에서 벌써 드러나고 또 알 수 있는 것이다. 3회 한일 전문기사 교류대국을 마치고 권희철 씨가 쓴 글을 보자. (바둑1972.2)

 

일본기사들이 한국에 왔을 때의 임전태세, 그리고 일상행동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산만한 개인주의요 또한 관광기분이었다. (중략) 다음 대국진행상황이다. 이것도 개별적인 비평은 차치하고, 한 말로 해서 전원이 모두 투지가 없었다. 끈기가 부족했다. 앉은 자세부터가 마치 불안감에 휩쓸린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한일 프로교류전의 성적을 보면 6927, 7018, 7118패 정도로 허약했으니 자세는 물론이고 의기도 낮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이야기는 많다. 물론 자세 문제만은 아니다. 프로기사도 직업인임을 주장한 조남철의 육성을 듣자. (바둑1972.5)

 

바둑을 즐기는 대개의 사회인사들은 기사를 직업인으로 인식하고 있질 않은 것 같아요. 지도를 받고서도 기껏 저녁이나 대포 한잔으로 때우고 맙니다.”

 

기사의 자긍심은 경제적 뒷받침이 될 때에만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60년대 초 새로운 직업인으로 막 올라서려고 할 때 경제적 어려움은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남철 선생의 바둑 하나 보자. 바둑을 대하는 마음에 기사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4(나의 회심국, 20년 만의 대승부)

(1963년 일본기원. 백 명인 藤澤秀行 : () 7단 조남철)

 

바둑돌을 손에 쥔 지 어언 44. (中略) 심중은 여러 가지로 착잡했다.

그 까닭은 첫째 내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절호의 찬스라는 점.

둘째 보급에 전력해온 나로서 정당한 수법을 보급했는지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다는 점.

셋째 국내 팬들이 기사들의 단위에 대해 일본기사들과 비교하여 약하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풀어볼 수 있다는 점...”

 

(초반 포석은 흑이 2연성을 취했다.) 나는 한국사람이다,라는 민족적 주체의식이 작용하여 우리나라 재래식 화점포석을 두어보고 싶어 2연성을 택했다. (바둑1975.2)

▼ 20년 만의 대승부

 

1에 불응하고 흑2 지킨 것이 크다. 이후 흑의 모자가 시원하다. <4-1>는 이후의 진행. 흑이 유리하며 4집 남겼다.

 

 

2) 1970년대 - 기사의 정체성 확인

   

1974년엔 소위 기사파동이 발생했다. 이 파동은 197612월이 되어서야 매듭이 지어졌는데, 한국기원 집행부의 대국료 착복에 대한 항의와 기사 수당의 인상 등을 요구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항의에 참여하였는데, 1976년 기사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이때부터 기사들의 한국기원 실무 참여가 이루어졌다. 소위 실무이사 제도이다.

 

이 기사파동은 전문기사 스스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사파동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기 때문에 바둑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산되는 긍정적 효과까지 가져왔다. 이후 아마추어 대회가 샘솟듯이 여럿 탄생한 것이 그 증거의 하나이며, 기사에 대한 경제적 대가를 주어야 한다는 인식 또한 높아졌다.

 

기사들도 인간으로, 인간은 그 어떤 욕구보다도-권력, 성욕, 식욕 등-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그것이 실존적이든 본능적인 것이든. 그러하기에 기사의 정체성은 그 언제나 반성의 여지가 남는 것이었다. 1980년에도 기사 정체성에 대한 현실적 여건의 개선과 의식적 태도는 아직 부족했다.

 

최근에 KBS TV에서도 새로 기전을 시작하여 기전의 수는 무려 10개나 되었다. 내가 기사생활을 시작한 때만 해도 불과 두 개의 기전이 명맥을 유지했던 것에 비하면 무대가 참으로 넓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할 때 기사가 단순한 기보의 생산자여서는 안 되겠다고 자계(自戒)해 본다. 바둑은 다른 경기와 달라서 예도의 면이 그 근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김인. 바둑1980.2)



이른바 '바둑계파동'을 종언하는 한국기원-대한기원 통합 기자회견.
최재형 한국기원이사장과 황용주 대한기원이사장이 화합의 악수를 하고 있다.
1976.12.01. (자료사진/월간바둑)



 

3) 1980년대 - 기사의 정체성 높아지다

 

1980년대 들어 기전 예산이 커지는 등 기사들의 경제적 여건이 많이 좋아졌다. 김우중 대우 회장이 한국기원 총재, 서정각 씨가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기사들의 경제적 처우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애기가 층을 확대하려는 멤버십제도와 기사들의 기업체 취업이 그것이었다.

 

멤버십제도는 애기가들에게 참여를 고취하는 것이었으며 기사취업은 경제적 뒷받침을 하려는 것이었다. 둘 다 오래 지속하지 못했던 점은 아쉬웠으나(멤버십제도는 수년을 가지 못했으며 기사취업은 일부가 1997IMF사태까지 지속되었다) 전문기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하게 하는 효과는 매우 컸다.

 

1985년 연구생제도를 정비할 때 어린 소년들의 지망이 25명에 이른 것은 그 단적인 증거라고 하겠다. 이 때 연구생으로 들어온 소년 중에 이창호가 있었다. 요컨대, 사회적 인식과 경제적 뒷받침은 기사의 정체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실력의 상승과 전문기사의 충원에도 긍정적임을 말해준다.

 

4) 2000년대 - 바둑의 스포츠화로 정체성이 변하다

 

기사들의 직업 정체성은 8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97IMF사태는 바둑의 성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그 이후 분명해진 것은 기전 외에 전문기사의 활동 영역이 별로 넓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 기사의 수, 기전의 수 (시대 구분에 따른 것)

 

기사의 수

기전의 수

1965

 34

 4

1975

 67

 6

1984

 88

11

2001

184

15 (여류기전 1, 신예기전 3, 9단전 1 포함)

 9 (국제기전, 여류기전 2, TV선수권 1 포함)

 

1984년에 비해 2001년 기사의 수가 2배로 늘어도 기전의 수는 비슷하다. 아니, 신예기전을 제하면 변함이 없다. 기전 수에만 기준하면 기사의 공급이 과잉한 상태인 것이다.

 

90년대 초 바둑도장과 바둑교실이 전문기사의 새로운 활동 영역이 되었으나, 확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사회의 넓은 층-세대로나 직업으로나-과 교류가 여전히 부족했던 것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전문기사의 실력은 급격히 향상되었는데, 이는 프로의 직업 자긍심을 높여준 효과가 있었지만, 그에 비례한 경제적 보상이 부족했기에 정체성의 발달에는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했다.

2000년대 초 바둑의 스포츠화 추진의 배경은 이러한 경제적 불안이 정체성 불안으로 이어진데 있었다. 그리고 바둑도장의 활성화에 따라 수가 많이 늘었던 기사 지망 소년들의 학업 지원(체육특기자 종목)을 스포츠화를 통해서 얻고자 한 것도 중요 원인이었다. 2002년 체육인정단체 승인, 2007년 전국체전 참가 등 스포츠화는 공식적으로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체육인정단체로 가맹된 것은 그 결실.

 

그러나 여전히 기사들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데, 바둑의 본질이 스포츠의 본질에 딱 들어맞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둑의 장점인 예()의 측면을 무시하면서 개인을 단체에 속하게 하고 있는 점, 속기의 범람, 기사 내 연령의 다양성에 따른 적응의 어려움 등이 있는 것이다.

 

 

3. 아마추어의 제도화와 기사 정체성

 

기사의 정체성이 높아진 것은 아마추어의 단급 정비와 발전에도 그 원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컸다. 아마와 프로는 함께 하는 것. 아마의 정체성이 분명해질수록 프로의 정체성도 분명해지며, 프로의 정체성이 뚜렷해질수록 아마의 정체성 또한 뚜렷해진다.

 

70년대 중반엔 아마대회도 많이 열렸다. “불꽃처럼 번지는 아마 기계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자.(바둑1978.5)

 

재작년 말 기계 통합 이후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한 아마 기계는 작년도 제1회 아마10걸전의 신설을 계기로 단비에 죽순이 자라듯 여러 아마기전이 부활 또는 신설되어 이제 한국기단에는 아마대회의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이제 한국의 기단은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아마기계가 융성하고 있고 그것은 곧 한국기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왜 아마추어 대회가 중요한가? 그것은 아마추어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참여의 의미를 통해 바둑이란 무엇이냐, 그 정체성을 확산하며 사회적 인식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다. 아마는 프로의 거울이며 그 역() 또한 진실이다. 거울 없이 자아 인식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적인 아마대회의 확산이 70년대 중반 크게 일어났던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아마추어의 단급 제도가 기반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가 될 수 있는 아마추어 단급의 제도화와 성장을 다음 (2)(3)이 알려준다.

 

(2) 아마 유단자증 발급자 수

년도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아마유단자 수

  47

  16

  21

   6

  17

 167

 269

 385

 

(3) 월간 바둑단급인정시험제도에 의한 아마 단급 발행 수

 

1967.1

1970.1

1980.1

1983.1

1986.1

1991.1

1994.1

 

10

25

11

3

7

4

22

143

114

56

32

28

11

총계

22

153

139

67

35

35

15

 

(3)의 자료만을 볼 때 80년대 중반엔 바둑계의 발전이 더딜 것이라는 정체감(停滯感)과 우려가 일부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갖게 된다. 아울러 80년대 중반까지의 바둑인구 확산이 실제적인 한국 바둑인구의 저변 최대치에 가까운 거 아닌가 하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기사 정체성의 불안도 이제 설명 가능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단위 무용론이 점차 머리를 들고 있었고 또 오래지 않아 승단대회를 철폐했는데, 그것은 기사 정체성의 확립이 프로기사 단위의 가치와도 맞물리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다. (4)에서 보듯이 90년대 중반엔 단위의 권위가 약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1982년 일본의 기사 수는 386명이었고 그 중에서 9단의 숫자는 63명이었다.

 

(4) 프로 전체 수와 프로 9단의 수

-------------------------------

             전체 수       9단의 수

1982        81                1

1994       123               9

--------------------------------

 

1988년엔 이미 34단이 9단보다 나은 성적을 내고 있었고, 90년대 초엔 9단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9단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다. 즉 프로의 단위가 가치가 낮아지면 아마추어 단위의 가치도 낮아지는 것이다. (3)(4)에서 보듯 80년대 중반 아마단 발급자 수의 하향 추세는 프로 단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요컨대 프로의 숫자가 적정 숫자보다 많아지면서 프로의 가치가 낮아지는 현상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 90년대 중반 단위 무용론은 단순히 34단이 프로기전에서 우승하는 것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프로의 인플레이션이 있었던 것에 대한 하나의 반성이자 반응이 컸던 것이다.

 

기전 숫자는 크게 늘지 아니하는 상황에서 세계대회의 확산이 대부분의 프로에게 경제적인 여건을 호전시키지 않는 것도 현실이었다.


바둑의 체육전환을 선언하는 백만인 서명운동 발대식 장면. 2001년. 한국기원.


 

 

4. 돌아보는 정체성의 성장과 위기

 

한국에서 바둑이 사행성 오락이 아니라 건전한 놀이로 인식하게 된 배경의 하나는 전문기사 제도의 혁신에 있었다. 조남철 선생의 개척자 역할을 높이 인식하게 되는 소이다. 실로 사회적 인식과 직업의 정체성은 서로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았던 60년대 70년대의 기사들에겐 정체성의 요구와 실천이 힘든 과정이었지만, 그 시절의 정체성 확인은 한국바둑의 성장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첫째, 구한말 국수들의 인식을 벗어던지기는 쉽지 않았는데, 기사들의 정체성 확인 과정에서 내기바둑과 같은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

 

둘째, 전문기사 제도의 확립 없이 바둑의 정체성은 없었기에, 바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형성과 확산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실로 사회의 긍정적 인식은 곧 바둑인이라는 전문인에 대한 인정과 다름없었다.

 

정체성 확립의 시점을 하나로 모은다면 그 시간대는 기사파동 직후이고, 기사의 정체성이 높아진 것은 80년대의 호황-경제의 성장에 힘입고 천재들의 활약에 힘입어-이 바둑의 이미지를 높이고 직업에 대한 호감을 높인 것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정체성 확립에 일본의 바둑과 일본에서 활약했던 조치훈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는 점이다.

 

조치훈의 활약으로 바둑에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바둑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접하였던 바, 그러한 정보가 곧 한국에서 바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긍정적 변화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요약하면 기사의 정체성은 80년대 중반에 피크를 맞이했다.

그것은 앞서 여러 자료가 말해주는 바다. 1980년대 중반 바둑의 실질적인 발전이 정체하고 있다는 사인이 있었다. 아마추어 단급체제의 가치가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있다는 점, 프로의 숫자는 빨리 느는데 실질적인 경제적 뒷받침이 되고 있던 기전의 수는 그에 맞추지 못하고 더 이상 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하나 덧붙인다면, 기사의 정체성은 단순히 자긍심이나 전문성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수입이나 사회적 인식과 밀접한 것으로, 그것은 곧 아마추어의 제도화 수준과 함께 한다. 아마추어의 제도화가 잘 되었다면 당연히 그것은 프로와 아마의 연계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곧 프로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여건의 향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볼 때, 프로에 대한 아마추어의 태도가 일본과 같지 않았던 한국에서는 기사의 정체성이 언제나 약간의 불안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현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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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77 |  2013-01-18 오전 2:59:3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많은 부분에 공감합니다.
80년대 중반이면 대학 생활하면서 따먹기 배울 때인데...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대비하는 대안까지 나온다면 좋겠네요. ^^*  
루트5 |  2013-01-18 오전 9:51:3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문박사님이야 말로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신 분이 아닐까 합니다. 바둑판에서 돌이 왔다갔다하는 것이 바둑의 모두는 아니죠.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바둑에 관한한 진정한 사범님 이신 것 같습니다.  
高句麗 |  2013-01-18 오후 12:03:1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기사들의 수입문제라
프로기사들이 너무 많아요 그렇다고 뽑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1년에 3명으로 입단자들을 줄여야 합니다. 즉 중국과의 경쟁해서 살아남을수 있는 천재들만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프로기사들도 기전에만 기댈것이 아니라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기원을 운영하던가 바둑학원을 운영하던가 강사를 하던가
다른 직업으로의 전환도 필요하리라 봅니다.
제가 프로기사가 감독도 하고 강의도 하고 해설도  
高句麗 |  2013-01-18 오후 12:06:5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관전기도 쓰고 하면 안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한참 성적을 낼때인 일류기사를 두고 한 말이고 성적이 좋지 않으면 승부보다는 학원 기원 강사등 승부외에 바둑과 관련된 다른 직업으로 바꾸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야구나 축구선수들도 은퇴하여 해설하고 감독하잖아요
그런식으로 승부가 승률이 않좋으면 다른 일을 찾아보는것이 프로기사의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죠  
하얀솔 |  2013-01-18 오후 10:54:3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段位 無用論은 프로숫자 과잉공급때문이 아니라, 저단이 고단을 이기버리는 단위파괴 현상때문입니다. 단위가 더 이상 실력을 나타내는 지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자, 실력=단위라는 종래의 통념이 무너진게 단위무용론입니다. 프로 숫자를 아무리 늘려도 저단자 평균실력이 고단자에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면, 단위무용론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얀솔 |  2013-01-18 오후 11:07:1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80년대 중반이후 아마단 발급자 수 감소와 프로단위 가치저하(단위무용론)과는 연관짓기 어렵습니다. 아마단 발급자 수 감소는 바둑인구 감소때문입니다. 바둑 유입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니, 신규 단위취득 희망자수 역시 감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든 고단자들을 대거 퇴출시켜 프로단위 가치를 억지려 올린다 한들 <신규 바둑인구 증가>라는 성과가 없다면, 아마단 취득희망자 수는 늘지 않을 것입니다.
 
와당 |  2013-01-24 오전 9:14:1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하얀솔님 잘못된 분석입니다. 아마단위 발급증 감소는 인터넷 바둑과 밀접한 관계가 잇습니다. 요즘 기력측정지수는 인터넷단위, 타이젬이 기준인것 같습니다. 굳이 아마 몇단 따지지 않고 타이젬몇단, 혹은 몇급이냐가 기력기준이 되기 때문에 돈들여 아마단증 발급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거죠. 웬만한 아마대회나 친목대회 기준치수는 타이젬을 비롯한 인터넷 바둑 칫수가 기준이 되어버린지 오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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