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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바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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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바둑 앞에서
2004-02-22     프린트스크랩
나의 반상 일기(2월 22일) - 다시 바둑 앞에서


2004년 1월 나는 난생 처음으로 입회인을 해봤다. 국수전 도전2국을. 입회인은 입단한지 20년이 지나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나이가 든 것이다. 집 나이로 47.

1983년 입단과 2004년 사이에 나는 뭘 했을까.

2004년엔 난, 입회인을 맡아 함양(咸陽)으로 내려가는 새마을 열차 안에서 졸고 졸았다. 뒷 좌석에는 이창호 국수와 도전자 최철한 6단이 자고 있었고. 옆에는 한국기원 사무국의 박진서 과장. 앞좌석에는 기록을 담당할 이기혁 군과 계시를 맡은 전상윤 군이 앉았다. 소년들답게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라…. 나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좋아한다. 배인순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도 좋아한다. 송창식의 ‘왜 불러’도 패티김의 ‘사랑이란 두 글자는’도 좋아했으며 김추자의 가을도 좋아한다. 바하의 평균율도 마음에 닿는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나는 약간은 감상적인 악상을 좋아하는 듯하다. 아니면 지금 이 글 때문에 그렇게 떠오른 것인지. 어느새 나는 대국자에서 입회인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 멀리만 느껴졌던, 나와는 다른 세계의 존재라는 선배들의 입장으로 나는 바뀐 것이다. 바둑은 이제 내 앞에 있지 않고 바둑은 이제 내 옆에 있다. 옆에서만 바라보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제 중년의 위기도 넘어서고 있다. 40대 전까지는 저 멀리 놓여졌던 삶의 지평선이 40을 넘으면서 어느새 내 눈앞에 선명하게도 올라왔었다. 그래서 당황하고 불안해 했건만 이제 그걸 인정한다. 인정하고 있다. 그 현실은 피할 수 없는 나의 일부이다.

내려갈 때 나는 머리 속에 바둑에 대한 여러 구상을 하고 있었다. 첫 수에 대한 구상, 그 다음 수에 대한 구상. 그러나 막연한 구상. 내가 두는 바둑은 아니었다. 나는 흑1과 백2에 대한 자료도 수집하고 있었지만, 두 대국자에게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야 이 국수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

사실, 난 대국 전에 어떤 바둑을 둘 것인가 미리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마 단 한 번도. 반상을 앞에 두고 비로소 생각해 본 것이 전부이다. 아니, 그 경우에도 생각이란 개념은 적절치 않다. 그저 기분을 찾아보려는 정도이지 않았을까. 소목이냐 화점이냐. 그 정도의 결정에는 기분의 활기만 찾으면 되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의식? 반상 앞에 앉기 전까지 그런 건 단 한 번도 없었던 듯하다. 내가 흑이라면 상대가 백2를 놓을 때까지. 내가 백이라면 상대가 흑1을 놓을 때까지는.

아마 다른 기사들도 그렇지 않을까. 아니다. 듣기로 상대가 결정되면, 그것이 큰 비중의 대국일수록 상대의 바둑을 놓아보는 기사도 있다. 적어도 몇몇 기사는 그렇게 토로한다. 나는 그런 적이 없지만 - 상대의 바둑을 놓아보면, 나라면 이 때 어떻게 둘까? 그것을 생각할 듯하다. 그게 연구일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구체화는 피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 막상 대국에서 상대가 다른 수를 들고 나오면 나의 마음엔 빗나간 과녁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꽤 리스크가 크다. 심리적 동요가 없을 수 없다.

아마도 그러리라. 평시에 공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국을 앞둔 기사들의 준비일 것이다. 그것이 전부라고 해도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적극적으로 상대의 취약점을 찾아볼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할 것이다. 실력 있는 프로라면 취약점을 찾을 수 있고, 또 그런 쪽으로 반상의 흐름을 유도할 여력은 갖추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힘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준비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것도 사실이다.

대국이 다가오면 그 대국에 초점을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좁혀가고 맞추게 된다. 누구라도 그 시간의 강물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5국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도전기에서 승부의 긴장감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나는 조 국수에게 3대0으로 질 때까지 그런 긴장감은 조금치도 갖지 않았지만.

아니다. 나도 상대를 의식한다. 의식했음이 틀림없다. 나도 인간이다. 다만 부정하고픈 심정이 강할 뿐이다.

2월 6일. 함양에 내렸다. 눈 내린 함양에 내렸다.

2월 7일의 아침. 두 대국자의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다. 그 어떤 세계 속에 이미 자신을 집어넣고 있었다.
2월 6일의 저녁. 두 대국자의 행동은 평범했고, 표정의 어색함은 약간밖에 보이지 않았다. 긴장을 풀려고 조금은 노력하고 있었다.

2월 7일의 아침. 두 대국자는 표정을 풀고자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그냥 상황에 자신을 맡겨 두는 듯했다. 반상과 자신을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 보였다.
2월 6일의 저녁. 두 대국자는 내면의 긴장을 젖혀두느라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노력했을 것이다. 짐작키로.

최6단은 잠을 설쳤다. 대국 후 들으니 1시에 깨어났다던가. 그 다음은 안 물어보았다. 이 국수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물어볼 걸 그랬나. 그러나 승부를 놓친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물을 기분이 나지 않는다. 나는 의무를 지닌 기자가 아니었다.


기보1

2월 6일의 밤. 짐작키로 두 대국자에게 반상은 다음 기보1과 같았을 것이다. a나 b, A B 또는 가와 나…, 그런 것이 그림자로 잡혔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기보2

2월 7일의 아침 9시 30분. 두 대국자의 반상은 기보2로 출발했다. 그건 적어도 최6단의 머릿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제1국이 백이었던 때문에 제2국은 도전자가 흑으로 둘 것이 2주 전에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국수는 기보2 흑의 착점을 예상했을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렴풋이 안개 속의 그림자로만, 그렇게만 생각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을 통제하고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다음도 사실이다. 대국 전, 프로에게 돌은 명확하게 그려지지도 않지만, 또 돌이 맘에서 떠나는 일도 없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안개가 참으로 자욱했고 비도 많이 왔구나. 이 새벽도 그렇다. 그러나 곧 안개는 걷혀지고 비도 그칠 것이다. 언제나 내 마음을 덮고 있는 안개도 그렇게 언젠가는 걷혀질까.

대국자의 반상도 그렇게 덮여지고 또 그렇게 걷혀지는 것일까.

나에게는 이랬다.
반상 앞에 앉으면 비로소 맘이 정제되었다. 반상의 현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전엔 반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다만 안개 덮인 반상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희미하게 없는 듯이 떠오르고 가라앉고 했을 뿐이다.

오전 5시 33분이다.
쉬고 다른 일을 하자. 나는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다. 커피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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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kwak |  2004-02-22 오후 6:39: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뜸을 너무 들이네요  
soss1234 |  2004-02-22 오후 8:3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내부수리 신장개업 첫 손님맞이 설레임 느슨한(즐거운.야릇한)긴장감  
난바둑 |  2004-02-2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정말 제목에 꼭 맞는 좋은글이네요.. 전 개인적으로 글에 관한 재주가 부족해서 글이 좋다 안좋다 평가하기엔 무리지만 토  
난바둑 |  2004-02-23 오전 12:02: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읽었네요. 정말이지 이렇게 읽어봤던게 언제더라.. 앞으로도 좋은글 쭈~~~욱 부탁합니다.  
soojeong |  2004-02-23 오전 12:11: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카타르시스. 문 사범의 흑 1과 백 2의 글은 여지껏 들어보지 못한 대단한 명시. 내면의 깊고 아득한 글. 계속 3-4에 대한 글 기대합니다,  
등용문9 |  2004-02-23 오전 12:3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바둑판의 여백이라 거침없이 달려온 길에 잠시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 하네요 ^^  
지금둬요 |  2004-02-23 오전 8:5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나는 늘 목마름에 시달리면서도 물을 많이 마시지 못한다. 바둑에서도, 인생에서도...왜 그럴까...  
고운가락 |  2004-02-26 오후 7:0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글쎄요...^^...기보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 글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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