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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앞에서
2004-02-21     프린트스크랩
나의 반상 일기 - 2월 21일 - 바둑판 앞에서


나는 1983년 가을에 입단했다.

그 사이에 나는 뭘 했을까.
고등학교 3년을 쏟아부어 입단 실력이 되었을 때 나는 바둑으로부터 멀어졌다. 그 어떤 상실감, 피해의식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시 바둑에 전념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후 군면제를 받았을 때였다. 그해 1982년 봄 은행에 취직했다가 다음 날 사표를 냈다. 바둑을 두었다. 바둑은 당시의 나에게 자유로운 공기였다.

1988년 처음으로 도전기를 두어봤다. 박카스배 토너먼트에서 이쪽에서 올랐는데 저쪽에서는 조훈현 9단이 올라왔다. 그것 참!

5번기 중 첫 판은 충무 관광호텔 1층에 자리 잡은 특실. 두세 명의 사진기자가 있었던가. 내 자리는 전망이 좋은 자리였다. 창밖으로는 푸르고 맑은 하늘과 끝을 맞닿은 바다를 두고 점점이 솟은 섬들, 섬들. 창은 닫혀졌지만, 바람이 싱그러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조훈현 9단은 참 승부사였다. 무릎을 꿇고 반상 앞에 앉은 그는, 미동도 없었다. 나같은 하수와 두는데도 말이다. 반상 앞에서 그는 참으로 절제된 승부사였다. 내면으로 잘 갈무리된 승부에 대한 관념. 나에게는 그것이 없음을 나는 일찌감치 알았다. 그래서인지 승부의 분위기는 음악처럼 들려왔다.

첫수도 두기 전에 대단한 중압감이 왔다. 어디서 그 압박이 왔을까. 아마도 그건 나의 내면으로부터 왔으리라. 그것이 첫째리라. 나는 진짜 프로가 아니라는 자각. 그 일찌감치의 자각을 그 때처럼 깊이 느낀 적은 적어도 그 때까지는 없었다.

나의 인식관 인생관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1970년대의 바둑계에서 자랐고, 그 1970년대는 1960년대의 성장이었으며, 1960년대는 1950년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프로 바둑계에서 나 같은 인식과 태도를 갖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80년대는 한국 프로 바둑계의 과도기였다. 1990년대와 1970년대 사이. 그 이전의 시대로부터 멀어지고 1990년대를 준비하던 시대.


나는 당황했다. 기보1에서 나는 마음이 눌렸다.


기보1

내가 흑이었는데 조국수의 백1을 맞는 순간 압박감을 느꼈다. 흑2까지 당할 수는 없는 노릇. 왜 나는 기보2 흑1을 선수하지 않았을까. 언제나 선수할 수 있는데 말이다. 조국수는 국후 말했다. 그거 잘 모르겠다고. 차이가 있을까…, 하고.
















기보2

나는 왜 기보1에서 아차! 하고 기보2를 아쉬워했을까. 중앙의 모호함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내면에 깔려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라. 기보1 백1은 중앙의 두터움을 지향하고, 흑2는 뒤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조국수의 뛰어난 재능과 실력에 대해서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 투사되었고, 승부에의 자의식을 흔들었다. 그 인식을 벗어 던질 실력도 배짱도 나에게는 부족했다. 아니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앞에 앉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상대에 대해서도 모르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도 모른다.






기보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기억에 의존한다. 바둑연감을 찾기는 귀찮다. 지금 컴퓨터는 시간이 오전 4시 42분임을 알려주고 있다. 어제는 8시에 잤다. 피곤했다. 지난 6년 동안 분석적 사고에서 많이 멀어졌다. 어제 낮에는 후배와 전화로 새로운 통계를 배우느라 좀 지쳤다. data를 제대로 다루기 전에 좀더 나의 논리를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최근 나는 바둑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 표본은 프로와 아마추어, 그리고 문외한.

여하튼 그 바둑은 졌다. 돌을 던지는 순간, 조국수는 승부를 끝냈다. 나는 그 훨씬 이전에 끝냈는데. 과연 조국수는 승부사였다.

그 날 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국수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프로가 아닌 것을 안다고. 조국수는 말했다. 알면 됐어.

나는 1950년대의 바둑계,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1950년대의 바둑계를 알지 못한다. 나는 1958년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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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바두 |  2004-02-21 오전 11:4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너무 겸손하시내요. 문사범님도 훌륭한 프로입니다.  
soss1234 |  2004-02-21 오후 1:01: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예 반상에서 눈에보이는 반상의수읽기도 중요하지만 내면의 고무풍선도^^*  
soss1234 |  2004-02-21 오후 1:02: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프로(직업)도 좋지만 진짜 바둑을즐기고 바둑을 발전시키는것은 아마추어리즘^^*  
soss1234 |  2004-02-21 오후 1:0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프로직업노동은 승부 그 차체에서는 훤씬 앞서지만 자기껍질을 깨기에는 쫌^^*  
고운가락 |  2004-02-21 오후 2:0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스스로를 안다는게 얼마나 중요한지.자신에 대해서 알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저절로 생기지요.문사범님 같은 분의 글은 언제 읽어도 마음에 와 닿지요.바둑의발견처럼..{^J^}  
오분굳 |  2004-02-21 오후 2:50: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문사범의 글은 많은 생각을...  
면도날88 |  2004-02-22 오후 12:05: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바둑TV에서 문사범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매주 금요일이었던가, 목요일이었던가 자세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꽤 기다려지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헤라수스 |  2004-02-25 오후 10:47: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알면 됐어..... 화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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