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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 때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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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 때가 있었구나
2004-02-20     프린트스크랩
나의 반상 일기 - 2월 20일 - 국민학교 시절

나는 바둑을 늦게 배웠다. 국민학교 4학년인가 5학년인가, 그 때 배웠다. 어깨너머로. 그 때 평소 나를 귀여워 해 주셨던 김수한 선생님과 바둑책을 반 권 정도 보았을까. 다음 <기보1>에서 흑3을 보고 감탄을 마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기보1























내가 프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밤에는 잠자리에서 쉴리이만의 트로이 발굴을 읽고 장래 고고학을 해보아야지, 하고 꿈을 그렸던 것이 오히려 더 현실감이 있었다. 물론 지금 나는 안다. 쉴리이만의 트로이 발굴은 돈 많은 사업가의 19세기적 낭만주의적인 호기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대단하긴 하지만 그 발굴의 방식과 기록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꿈은 키워주었다. 유럽으로부터 먼 변방에 있었던 나에게도. 그것만도 대단하다.



기보2

국민학교 5학년 때 김천고등학교에 수학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셨던 유장열 선생에게 9점을 놓고 만방으로 졌다. 그 분은 참 잘 두셨다. <기보2> 백1 이하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기보3

그 때의 감탄 하나만 더 하자. <기보3>이 바로 그것인데, 흑이 단점을 어떻게 방비하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기보4

답은 기보4에 있다. A부터 L까지 어디에 두어도 흑은 단점을 연결한다. 그렇게도 다양한 수단이 숨어 있다니! 그 다양성은 내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도 바둑은 그냥 그저 둘 때만 두었다. 잊고 살았다. 때때로 꺼집어낼 뿐이었다. 큰 재미는 못 가졌던 것이다. 바둑 말고도 놀 것은 많았다. 화투도 포커도 장기도 있었다. 막걸리도 때로 약간 마셨다. 물론 술로 마신 것은 아니었다. 누가 마시면 옆에서 한 잔. 당연하게도 한 잔씩은 주셨다.

국수전 도전2국을 감상하려니까 왜 이리 옛 생각도 나고 하는지 모르겠다. 역시 글이란 것은 기억을 꺼집어내는 마력이 있나보다.

사실 내 의도가 아니라 주변에서 가끔 나를 데리고 기원에 갈 때가 더 많았다. 국민학교 6학년 때다. 영남일보 기자 한 분이 대구로 나를 데려가셨다. 1970년 여름이겠다. 대구 수성호에서 시원하게 저녁을 먹은 기억이 있으니까. 호수를 마주보고 앉긴 앉았는데 뭘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기보5

대구에 간 연유는 이렇다. 당시 윤기현 6단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셨고 작년에 작고하신 이창세 3단도 독일에서 잠시 귀국했었다. 그래, 기념으로 대구에서 초청을 했고 공개 바둑을 두셨던 것이다. 작고하신 정창현 6단께서 해설을 했다. 기억에 남는 건 기보5.

윤기현 사범님의 백1 백3에 놀랐다. 야! 저렇게도 두는구나.












기보6

그 다음 날, 기자 분이 나를 정창현 6단과 억지 대국을 시켰다. 치수는 9점. 그것이 기보6. 흑22까지만 기억난다. 내가 형세가 유리한 걸로 당시는 생각했었는데 물론 결과는 불계패였다. 그래도 흑20 흑22는 그럴 듯한 감각이요 수순이 아닐까 지금 생각해 본다. 그 때가 6급.

옆자리에는 이창세 3단께서 크게 웃으면서 바둑을 두셨다. 상대와 대화도 즐겁게 하시면서 가볍게 화기애애하게 두셨다. 난 기가 눌려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는데. 아마도 지역 유지들과 지도대국을 가볍게 하셨던가보다. 내 바둑이 끝난 후 옆에서 보았는데, 백 대마가 아주 위험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한 집도 없을 듯하던 백 대마가 오히려 흑을 크게 잡고 만방으로 이겼으니, 나는 프로의 실력에 놀랄 뿐이었다. 그 날 그 방에는 바둑판이 3개 있었다. 넓지 않은 방이었는데 사람들은 꽉 찼다. 담배 연기도 넉넉했고.


그랬던가. 그런 한 때가 있었구나.
5시 58분. 깨어난지 1시간이 훌쩍 지나갔구나. 술을 끊었더니, 아니 술 생각을 던졌더니 생활이 변했다. 밤에 이것저것 하던 사람이었는데…. 다시 자리에 누울까 말까.

창밖은 아직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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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사리 |  2004-02-20 오후 1:26: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조용한 산사에 앉아 먼산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 듣는 그런 기분이네요....좋은글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고운가락 |  2004-02-20 오후 8:50: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슬슬 과거가 보이고~.저도 초등 4학년때 7급이 아직도 7급이건만....너무도 자연스러운 표현에 " 역시~"를 연발합니다...가볍지만 가볍지 않게 흐르는 글...^^  
고운가락 |  2004-02-20 오후 8:53: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문 사범님...혹시 교보에 오시거든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이런글 써도 될라나 모르겠지만 !!!! ( 저를 기억도 못할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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