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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은 아들과 나란히 앉아 차 한잔 마시면서 지난날의 고생을 추억처럼 얘기하지만...아들 이동휘 초단과 수필작가 어머니 송영화 씨. |
아들을 프로기사로 키운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수필집으로 펴내 화제를 모은 책 <반집>. 저자 송영화 작가는 지난해 8월 입단한 이동휘 초단의 어머니다. 송영화 작가와 나눈 인터뷰에 이어, 저자가 사이버오로 회원들을 위해 <반집>에서 직접 고른 수필 한 편을 소개한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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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나선 여행
송영화 (이동휘 초단 어머니)
여행을 간다. 무작정 간다. 남해로 갈까? 아니, 이번엔 여수로 갈까? 남편이 내키는 대로 도시 이름을 불러댄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차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여행이라고 떠나긴 하는데 당일 돌아올지 하루 더 머물게 될지 알 수는 없다. 그저 이틀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빠, 엄마가 남쪽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아이는 모른다. 지금쯤 아이도 남쪽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아이는 목적지인 순천을 향하는 단체버스 안에서 허공을 더듬거리며 바둑돌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바둑을 시작 한 뒤로 일 년에 몇 차례씩은 전국대회에 참가하곤 한다. 바둑대회는 한 판의 대국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서 8강이나 혹은 4강전에 오르게 되면 다음날까지 경기를 치르게 된다. 매번 떠날 때는 승패와 상관없이 하룻밤을 자고 올 요량으로 짐을 챙기지만 그 짐을 풀어보지도 못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일이 태반이다. 아이가 탈락했다는 연락이 오면 이내 허한 기분으로 바뀌어 운전대 방향은 여지없이 집으로 향한다.
만약 아이에게 좋은 결과가 있어 하룻밤을 더 묵게 된다면 방을 잡아놓고 주변 일대를 돌아보는 마음이 한가할 것이다. 처음 가보는 그곳에 색다른 게 없어도, 낯선 식당에 불쑥 들어가 밥을 먹어도, 사는 게 이런 맛이라고 조금은 들뜬 기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줄곧 그런 기대를 하며 길을 떠난다. 아이 몰래 따라가는 우리의 여행은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언제나 떠나봐야 아는 것이다.
멀리 대국하는 모습이 보이는 관중석에 앉아, 읽어도 내용이 희미한 책장을 무던히도 많이 넘겼다. 대국장 안으로 입장이 불가할 때에는 출입구 주변에서 온종일 서성이기도 했다. 지겹도록 기다리는 일은 남편이나 내겐 또 다른 낙이었다. 대국자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계속 이겨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아이가 대국을 끝까지 치르게 돼서 하루 종일 기다리게 되기를 늘 바랐다.
우리의 관심이 아이에게는 짐이 되었던 것 같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해왔지만 승부의 세계에서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아이는 잘 알고 있다. 대국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내내 아이의 표정만 살피다가 이겼는지 졌는지를 점치곤 했다. 화제의 중심이 결국에는 승부에 관련된 질문으로 이어지고 마는 것이 아이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바둑판 위에서 공들여 집을 짓고는 다시 그 집을 쓸어내듯 우리는 아쉬움을 털어내는 연습을 끝없이 한다. 일곱 살부터 바둑을 시작한 아이가 열네 살이 되었는데도 패배를 받아들이는 일이 여전히 쉽지 않다. ‘다 이긴 바둑을 아깝게 졌다’ 라거나 ‘실수로 한 수를 못 봤다.’ 라는 말이 아직도 솔깃하다. 그것이 실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아쉬움이 고개를 든다.
▲ 초등학생시절 바둑대회에서 대국하는 이동휘. 이때는 볼살이 제법 붙어 있는 오동통한 꼬마였다.
대회를 가보면 수백 명의 아이들이 가슴팍에 이름을 붙이고서 각자의 상대와 시합을 한다. 일제히 바둑돌을 놓기 시작하면 왁자하던 실내는 일순간에 정적이 흐르고 오로지 바둑판에 돌 놓는 소리만 ‘따닥따닥’ 대국장을 울린다.
수백 명의 대국자 중에 이기는 기쁨을 누릴 이는 몇일까? 예선전을 마치면서부터 절반의 인원이 빠져나가고 대국이 한판씩 끝날 때마다 대국자가 쑥쑥 줄어든다. 마지막 한 사람의 승리자를 위하여 그 많은 이들이 쓸쓸히 걸어 나가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먼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가져다 준 승리의 쾌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승리는 성취감을 안겨주는 좋은 자극제가 되었지만 단계가 올라갈수록 가파른 길을 오르는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이기는 일이나 지는 일이나 돌아서 보면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이만큼 와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우리는 애써 여행이라고 말하며 낯선 도시의 표지판을 읽으며 달린다. 나는 더 이상 남편에게 ‘그 먼 길을 가면서 왜 아이를 만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도착할 곳이 어디라도 남편의 마음이 아이가 머물고 있는 곳에 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혹시나 아이로부터 하루를 더 묵어야 한다는 연락이 온다면 아이의 잠자리를 봐주기 위해 곧바로 운전대 방향을 돌릴지 모른다.
길을 나선 것은 순전히 우리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다. 대국장 한 켠 관중석이거나출입구 근처 벤치이거나 주차장이거나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들의 마음이 무엇이 다를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이에게는 패배의 눈물도 아름답다. 이기거나 지거나 승부의 결과는 제 꿈을 향해 나아가야할 아이의 몫이리라.
가다가다 결국은 순천에 들르긴 할 것이다. 그저 바둑대국을 치르는 체육관 옆을 스쳐 지나서 하릴없이 어딘가를 향할 것이다. 그곳이 여수가 될지, 더 멀리 목포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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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SK배 경상일보대회 1-2학년부에서 우승했을 때. 왼쪽에서 두번째 아이가 이동휘 초단이다.
▲ 울산MBC사장배 1-2학년부에 나가서도 우승했다. 사진은 유창혁 9단의 지도다면기를 받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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