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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 5층
글쓴이 간지럼      조회 430   평점 810    수정일 2019-09-06 오전 1:40:00

 1999년 그해 여름은 지루할 정도로 무더웠다. 에어컨 시설조차 열악했던 그 시절 지하철을 타고서 왕십리에 도착했다.

 한국기원은 4층 건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층이 대회장이었고, 3층은 기원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4층은 특별대국실과 그 맞은편에 기사 연구실이 있었다. 연구실에는 항상 이창호 9단과 테니스를 치고 돌아온 양재호 사범님이, 루이 9단. 그 남편인 장주주 9단과 만원짜리 내기바둑에 푹 빠진 김일환 사범님, 짧은 단발머리로 탄력붙은 공처럼 튕겨져 오를 듯한 모습의 박지은 9단, 유창혁 사범과 서봉수사범의 5번기 대국직후 승자와 패자가 자리를 뜬 후에도 여전히 촉촉이 젖어 있었던 흑백의 바둑돌들. 중학생이었던 이세돌 9단과 1인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밀려 나고 있었지만 저력을 과시하며 승리를 따낸 조훈현 9단. 통은 넓고 발목은 좁아지는 그러나 멋없어 보였던 최신 유행바지를 입고 다니며 사업가 기질을 맘껏 발휘하고 있었던 김성룡 사범.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또 화려함과 동시에 부러움의 공간이었다. 천재들이 모여서 그 기재를 맘껏 뽐내며 한 시대를 호령할 수 있게 해준 한국기원은 4층이었다.


  아니다. 5층이었다.


   프로대국자들의 기보를 얻으려고 사무실로 향하는데 초등생티를 갓 벗은 학생들 무리가 뛰어 들어왔다. 박정상9단(현재)의 손에는 수 십 장의 기보가 들려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무리를 따라가 보았다. 건물 옥상에 지어진 가건물 안에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수 십 명의 아이들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1년에 걸쳐서 진행된 연구생 리그가 막바지에 이르렀으며 입단이 결정되는 마지막 판을 치르고 있었다. 화려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5층의 가건물 속에서 완생을 꿈꾸며 미생의 현실을 밀어 올려야 하는 공간이었다. 확실한 미래도 보장받지 못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거대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존재들. 어린 나이에도 그 무게를 견뎌 내고 있는 저 아이들의 표정은 단순히 승패의 심각함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넘어서 삶의 거대한 이치를 깨닫기 위한 듯한 모습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 순간 5층은 나에게 더 이상 5층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바위를 더 이상 밀어 올리지 않으려 한다면 평화롭고 화려한 4층의 한국기원은 파도 앞에 쌓아 올린 모래성과 다를 바 없으리라.


  최근 바둑계의 부진을 놓고 안타까워하는 바둑애호가들이 넘쳐나고 있다. 나부터가 그렇다. 화려했던 한국바둑의 전성시대를 전설처럼 입에 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바둑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끝없이 5층을 향해 또 산 정상을 향해 고행을 거듭하고 있던 어리디 어린 그 아이들에게 어떤 조그마한 따스함이라도 건냈던가? ‘발렌시아’의 축구 신동 이강인은 10여 살 때부터 온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래서인지 고행의 길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최고의 선수로 거듭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바둑계는 세계최정상에 가장 가까운 스포츠이지만 그 누구도 힘들여 어린 연구생들의 이름을 기억조차 해 주지 않는다. 그들을 위한 제도적, 물질적, 정신적 응원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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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길 | 2019-09-06 오후 2:10  [동감 1]    
아름답습니다.
간지럼
09-09 오후 9:25
슬프고 외롭지만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한 것이 우리들 글이고 말이며 인생이겠죠?^^
영포인트 | 2019-09-06 오후 5:44  [동감 0]    
좋으신 글, 고맙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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