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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철선생 평생의 후회 : 그 때 1년만 더 바둑공부를 계속할 걸...
글쓴이 술익는향기      조회 969   평점 1800    수정일 2019-01-16 오후 4:31:00
조남철 선생님에 대한 흥미로운 글이 있어 choiwonyoung.net 에서 퍼온 것임을 밝혀 둡니다. 사진은 여기 올릴 수가 없네요 ㅠㅠ.... www.choiwonyoung.net 에 가시면 관련 사진도 3장 볼 수 있습니다.


“이 돌은 조남철이 와도 못 살려." .

살 수 없는 자신의 돌을 묵묵히 들여다보기만 하는 상대에게 조 아무개가 와도 안되니 빨리 항복을 하라는 재촉장이다. 한국 현대 바둑의 아버지 ‘조남철’은 이렇듯 이름 자체가 대명사였다. 

조남철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동아건설 서소문 사옥 별관에서였다. 1974년경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최원석회장의 바둑사범으로 오셨다. 학 같이 마른 분이 꼿꼿하게 앉아서 네모난 뿔테안경 너머로 가늘고 긴 눈만 간혹 움직이는데 내공을 감춘 무림 최고수의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50대 초반이셨는데 상당히 연세가 많으신 것처럼 느껴졌다. 이 후 최회장대신 내가 주로 배우게 되었다.

조선생은 “바둑은 모양이다.”라고 하면서 처음 배울 때부터 모양을 중시하셨다. 시작은 9점으로 지도대국을 했는데 1년쯤 지나자 7점으로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해야 복기도 간편하고 공부가 더 잘 되기 때문이었다.

나 같은 하수와 지도대국을 하실 때도 어떤 때는 3-4분씩 장고를 하시는데 그야말로 반면무인의경지를 보여 주셨다. 그럴 때마다 무척 송구했지만 “장고하시면 죄송하니 빨리 두시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10분이 넘게 시간이 아까운 장고를 늘 하지만 언제나 아무 말씀 없이 반면만 응시하셨다.

내가 치석 7점의 힘으로 초반에 당신의 돌을 맹렬히 공격하면 마치 전문기사와 두시는 것처럼 심각하게 고개를 갸우뚱 한 후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돌 하나를 놓으신다. 김인 국수와 두실 때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같은 멘트를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또 “에라 모르겠다”는 정말 모르는 게 아니고 이미 수를 다 읽은 확신에 찬 기합이었다.

지도대국이 끝나고 식사를 가끔 모실 때면 놀랄 정도로 소식을 하셨다. 위가 좀 작다며 거의 식사를 안 하시는데 신선 같은 느낌이었다. 바둑을 다 두고 복기 때 하신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

어려운 국면에서 “이런 때 뭔가 묘수가 없었나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보통수만 둬도 잘 두는 거요.”라고 대답하셨다. 훗날 미국에서 인터넷 바둑을 둘 때 나는 아이디를 “보통수”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보통수보다 떡수를 잘 두는 나는 아이디를 떡수로 바꿀까도 생각했었다.

언젠가 “선생님은 항상 바둑 공부를 하시지요?”라고 여쭤 봤더니 예상밖의 대답을 하셨다. “내가 정말 바둑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일본 유학시절 딱 1년 반이었소. 기타니 선생 문하에 3년 있었는데 처음엔 말 배우고 적응하느라 정신 없었고 제대로 한 것은 1년 반이에요. 그 때 내가 1년 만 더 공부했더라면 9년이 아니라 10년 훨씬 더 갔었을 겁니다.”

국수전을 9 연패 하셨는데 그것이 아쉽다는 말씀이었다. “그 때 1년 반이, 지나고 나니 딱 2주 정도 시간이 간 것 같았지. 막 바둑 공부 제대로 시작했는데 그렇게 세월이 흐른 거요. ”

선생의 가는 눈이 지그시 감기며 당시를 회상하는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일본 유학 후 우리나라에 오셔서도 바둑공부를 계속 하셨지요?”

“내가 귀국한 지 얼마 안되어 해방이 돼서 한성기원 설립과 바둑 저변 확대로 너무 바쁜 나머지 솔직히 개인적인 공부는 거의 못 했어요."

선생의 동년배인 일본의 '후지사와'나 '사카다'는 40이 넘은 나이에도 바둑만 공부하는 것이 몹시 부러웠다고 하셨다.

“네, 선생님은 당시에 어려운 일이 참 많으셨지요?”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들 때는 바둑을 둘 수 없을 때였어요. 6 25가 터지자 늦은 나이로 군대를 갔는데 군대에서 바둑을 둘 수 없었지. 어느 전선에서 선임 하사가 돌격부대를 뽑는 데 내가 자원했어요. 적의 총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지만 운이 좋으면 부상만 당할 것이고 그러면 후방 병원에서 바둑을 둘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지. 다음날 적진을 향해 돌격하다가 다리가 뜨끔하면서 퍽 쓰러지는데 ‘아, 나는 이제 바둑을 둘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의식을 잃었지요.”

이 말씀을 들은 후 나는 바둑 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했다. 조선생님 덕분에 귀한 바둑판을 얻게 되었다.

<사진> 이 비자나무 바둑판은 大正 6년 (1917년) 작품이다. 1934년 기타니 선생이 방한하여 기념대국을 하고 사인을 한 바둑판인데 이 후 조선생이 한사람 한사람 찾아다니면서 명인들의 사인을 모으셨다. 연대 순으로 기타니 (水月이 선생의 호다), 사카다, 임해봉, 이시다, 조훈현, 조치훈 명인이다.

선생님은 한국 최초로 9단이 될 수 있었지만 스승인 기타니 선생이 8단이라는 이유로 9단 되기를 극구 사양하였던 것처럼 이 바둑판에 사인을 안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하시라고 할 걸 하는 후회가 된다.

바둑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지금은 중국으로 그 중심이 넘어가고 있다. 바둑을 둘러싼 경제규모는 물론 우리가 우위에 있던 세계대회에서도 힘을 못 쓰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국민의 20%에 달하는 인구가 바둑을 알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만큼 조선생의 바둑 저변 확대가 성공한 것이다.

한편 ‘알파고’라는 이름으로 황야의 무법자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바둑두는 인공지능. 인간의 머리로 승부하던 전문기사들에게 엄청난 폭탄이었고 동시에 바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조남철 선생이 알파고를 보셨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궁금하다. 어쩌면 알파고와도 “보통수”로 두면 된다고 하셨을지.. 아니면 이제 조남철이 와도 안 된다고 하셨을지… 학처럼 꼿꼿하시던 조남철 선생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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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익는향기 | 2019-01-16 오전 5:04  [동감 0]    
관리자님께,
글이 전부다 붙어서 읽기 힘드네요..
칸 바꾸기를 시도 해봤는데 글이 다 붙어서 떡이 되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ㅠㅠ
혹시 가능하시면 중간 중간 문단을 나눠 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팔공선달
01-16 오전 7:53
올만...... 본문 수정은 할 줄 모르고 아래에 답글로 함 달아 보았성. ^^
술익는향기
01-16 오전 11:13
아이고 선달갑장 오랜만입니다... 수정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
팔공선달
01-16 오후 00:02
^^*
운영자55
01-16 오후 4:32
수정해 드렸습니다. 건강하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술익는향기
01-17 오전 1:03
정 선생님 시간 내서 깔끔하게 정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엔 더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오로가 되길 기원합니다.
낙지대그빡 | 2019-01-18 오전 9:27  [동감 0]    
반가운 이름에 서둘러 로긴해서 흔적을 남깁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시겠죠? 자주 올려주세요!!
술익는향기
01-18 오후 7:35
오랜만입니다. ^^:
낙지님의 유머스런 글좀 계속 써 주시면 저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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