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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차이
글쓴이 백보궁      조회 427   평점 400    수정일 2018-01-10 오전 9:38:00



얼마 전 TV에서 시청한 인지심리학 교수의 강의 내용 중에서 흥미 있는 것이 있었는데 색깔을 보는 테스트였다. 두 개의 색을 보여주고 어떤 색으로 보여지는가 하는 질문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전혀 다르게 보이는 두 개의 색깔이 사실은 같은 색이라는 것이다. 왜 같은 색이 다른 색으로 보이는가 하면 그 색의 주변에 있는 색을 다르게 배치함으로써 같은 색이 서로 다른 색으로 보이는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이 실험이 보여주는 사실은 색깔이라는 것도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위의 색과의 관계로써 우리의 두뇌가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얘기는 오래 전 활동했던 남성 듀엣가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A와 B 두 사람으로 구성되어 활동하다가 나중에 사정이 있어 A가 빠지고 새로운 멤버 C가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사람들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처음에 A와 B로 활동할 때에는 A가 월등히 잘생겨서 B의 외모가 잘 생긴 건 느끼지 못하다가 A대신 C로 교체되고 나서야 비로소 B가 꽤 잘 생긴 미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새로 들어온 C가 상대적으로 B보다 못 생겼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B가 성형수술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잘생겨 보이는 것은 두 사람을 놓고 상대적으로 비교가 됐기 때문이다.
이 예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美라는 것도 그 대상 자체가 갖고 있는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현상이 아니라 상대적인 차이의 비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디 위의 예에서 뿐 만인가. 인간의 삶 자체가 모두 이런 상대적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웃집이 잘살면 상대적으로 내 남편이 못나 보이고 자신이 삶이 초라해 보이지만 이웃집 보다 잘살면 남편이 능력 있어 보이고 자신의 삶이 빛나 보이는 주부의 마음이 또한 그렇다.
키 큰 사람 옆에 있으면 내 작은 키가 두드러져 보이지만 작은 사람 옆에 있으면 아무도 나의 작은 키에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가 즐겨듣는 음악은 음의 상대적 차이로 이루어진 것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는 각 음의 상대적 차이이지 각 음이 홀로 독자적인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레가 레인 것은 도나 미와의 차이일 뿐 레만을 뚝 떼어놓고서는 레의 성질을 우리는 파악할 수 없다.


고저, 장단, 대소, 색깔, 남녀, 노소, 빈부, 父子, 미추, 잘살고 못살음, 선악, 나와 너, 좋고 싫음 등이 모두 상대적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관념일 뿐, 그 혼자서 독자적 실체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도 상대적 비교에 의해 존재하지 어느 하나만이 독립해서 존재할 수는 없다. 공간은 물체와 물체 사이의 비어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물체와의 상대적 차이에 의한 것이다. 일체의 물체가 없다면 우리가 과연 공간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도 상대적 차이에 의한 가상적 현상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라고 한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써 이것이 있다.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 소멸하고 저것이 소멸함으로써 이것이 소멸한다. 만물은 이렇게 상대적 의존에 의한 가상적 존재로서 자성(독자적 실체성)이 없다고 말한다. 연기는 현상계의 모든 현상이 존재하는 원리이자 발생 소멸하는 원리이다.


인간의 생각과 언어는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고 개념은 상대적 차이에 불과하다. 인간의 이러한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개념과 형상의 이전의 의식인 초의식에 도달한다. 이곳이 만상의 근원, 천지만물이 나온 곳, 이데아의 세계, 성인의 자리이다. 생각(명, 말씀)만으로 만상을 창조할 수 있는 사차원 신계이다.



다음은 도덕경 두 번째 장이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天下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세상 사람이 다 아름다움을 알고 아름다워지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음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선을 알고 선하려 하지만 그것은 선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고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내고 높고 낮음은 서로 뒤집히며(서로 반대를 나타내며) 음계의 소리는 서로 응하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므로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함이 없이 일에 처하고 말없이 가르치며 만물을 짓되 지었다는 생각이 없다.

살되 내가 없으며 하되 매이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그에 머묾이 없다.

대저, 머묾이 없으니 떠남도 없느니라.


상대적 분별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범부와 분별을 떠난 사차원 초의식 세계에 살고 있는 성인의 삶의 양식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범부는 내가 있어서 내가 일으키는 분별과 집착으로 주관을 갖고 객관을 상대하는 반면, 성인은 내가 없어 분별과 집착이 없이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여 하되 함이 없는 조화를 보이는 것이다.


성인은 어떻게 만물을 짓는가? 첫 장에서 말한 것처럼 명으로써 짓는다(유명만물지모).

어디에서? 무명 즉 분별을 떠난 초의식에서.


그러면 사차원 초의식 세계는 어디인가?

사차원은 시간과 공간이 없으니 여기다 저기다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사차원세계가 아닌 곳이 없다. 여기가 사차원이고 우리는 이미 사차원 속에 들어 있지만 몸이 있고 내가 있기에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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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靑 | 2018-01-10 오후 00:46  [동감 0]    
夫唯弗居 是以不去.
머물지 않아 사라지지 않는다.
(왕필본 하상공본)



위의 글은 도덕경의 저본인 왕필본과 하상공본 동일하죠. 그런데 도덕경의 본래의 모습인 원시본은 다음과 같죠.


도덕경면갑본 = 夫唯居 是以弗去.
도덕경간갑본 =夫唯弗居也 是以弗去也.


고지도술(古之道術)을 묻는 고대의 질문에 천하에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것이 도덕경이라면 먼저 도(道)가 뭐냐라는 지점을 알려주셔야죠^^ 장자는 일(一)이라 했지만 도데체 도(道)는 무엇일까요?
님의 연작에서 그것을 고대하며 한 사람의 독자로
기대를 합니다.
백보궁
01-10 오후 5:00
이청님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면갑본만 불거가 거로 되어있네요.
도가 뭐냐는 첫장에서 간단하게 언급이 되어있는데요. 먼저 도와 명(현상)을 나누어 말할 수가 있지만, 그것이 둘이 아닌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고요. 그러므로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 <분별하지 아니하면 그 묘함을 볼 것이요. 분별하면 그 분별이 구하는 것, 즉 물질적 현상의 색깔과 형상을 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상만을 보는 것은 분별에 빠져있는 것이고, 현상과 더불어 묘함을 본다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의식의 참모습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현상과 도가 둘이 아닌 상태(?)죠. 그러므로 도의 지점은 모든 곳이지만, 도를 깨닫고자 한다면 지금 여기서 보고 듣는 하는 자리라 하겠습니다.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들을때, 거기에 의식이 없다면 사물과 소리가 있어도 알지 못할 겁니다. 또 의식이 있어도 사물과 소리가 없으면 의식을 자각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대상에서 의식의 본 모습을 자각해야되는데 의식의 본래 모습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것이니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의식의 본 모습은 대상적으로 파악할수는 없는 것이죠. 공하나 또한 앎이니 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李靑 | 2018-01-10 오후 00:56  [동감 0]    
遠反則.
노자는 가장 먼 여행은 돌아오는 것이라 했죠. 反動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백보궁
01-10 오후 5:07
멀다고 하는 것은 분별이고 꿈속에 있는 것입니다. 꿈 속에서 나그네가 멀리 고향을 떠나 왔는데 돌아가려면 꿈을 깨면 되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경치를 즐길 때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가 너무 멀리 가서 고달파지면 돌아올 생각이 들겟죠.^^
비카푸리오 | 2018-01-10 오후 3:18  [동감 0]    
잘 읽었습니다. 보궁님 애독자가 될듯 합니다 ^^ 물리학적 제반이론과 유심적 이론들도
병행하여 많이 알고 계서서 여러 생각거리를 주시니 감사하구요~~ 보궁님의 공간의
식 개념은 유심론에 기반한 발상이어서 저로서는 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초월의식이나
4차원의식 혹은 공간의식등의 개념들이 사실 물질을 만물의 근본으로 여기는 물리학자
(과학자) 들에게는 이해할 수는 있어도 인정하기는 어려운 관념입니다. 저는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단 하나 살아남을 진리가 있다면 세상의 근원은 원자(물
질)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보궁님 사고의 핵심은 유심론적 관념론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을 비판하는 건 아니고요. 공간의식 또는 초월의식이라는 것도
물질로 이루어진 뉴우런의 초복합적 활동에 의하여 발생하는 차후의 의식이 아닐까하
는 저의 소견을 전하고 싶기에 이렇게 댓글을 달아봅니다.
백보궁
01-10 오후 5:38
비카푸리오님 의견 감사합니다.
아니 물리학이나 유심론 등의 이론의 문제가 아니구요. 실제의 문제입니다. 의식이 없다면 이 세상이 존재합니까? 내가 죽어서 의식이 없어져도 이 세상은 여전히 존재할거라구요? 어떻게 존재할걸 알지요?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이미 우리의 의식에 받아들여져서 의식이 인식할 수 있게금 변형된 상태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파동을 인간이 관찰하면 입자로 바뀌는 것처럼요.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은 의식이 사라지면 동시에 사라질 신기루와 같은 것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이 먼저일까요 물질이 먼저일까요? 의식이 실체일까요 현상이 실체일까요?
과학은 물질이 99.99999...% 비어있다고 말합니다. 0.0000000..1%는 소립자인데 그 소립자마저도 실은 파동이니 100% 진공만 잇는 셈입니다. 의식도 마찬가지로 진공 뿐이나 의식은 무정이 아니고 有情이니 진공의식이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묘족여인 | 2018-01-10 오후 8:18  [동감 0]    
백보궁님이 간결하고 쉽게 풀어놓는 도덕경 2장에 대해 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단지 개인적인 생각으로 말씀드리면 생이불유. 위이부시는 왕필의 해석이 더 나아 보입니다. 10장에서도 나오지요? 생이불유. 위이부시. 장이부재. 그리고 위 해석에서 있음과 없음은 서로 生하고...를(그 다음 전후상수까지.. ) 있음과 없음은 서로에 의하여 생하여지고...약간 틀어보는것은 어떨까요?
백보궁
01-10 오후 9:17
묘족여인님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주로 뜻이 통하는데 신경을 쓰고 문장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지금 제게는 왕필의 정확한 번역은 없고 노자를 웃긴 남자에 있는 도올과 이경숙님의 번역을 참조하고 있습니다. 생이불유 위이부시를 왕필은 뭐라고 번역했는지 궁금합니다. 생이불유에 대한 도올의 해석은 영 아닌 것같고, 恃를 도올은 기대다, 이경숙은 의존하다로 번역했는데 저는 매이다로 했습니다. 있음과 없음에 대한 님의 의견은 수용합니다.
망운진달래 | 2018-01-10 오후 11:02  [동감 0]    
완전 4차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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