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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三 級 碁人 散筆 |
| 글쓴이 원술랑 조회 16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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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잘 만들기로 유명한 중국에서 바둑이나 투전을 일러 ‘手談’이라고 한다고.
묘한 말이다.
친구들과 바둑을 대국할 때는 되도록은 말이 없는 것이 좋다.
두는 사람도 그러하려니와 옆에서 관전하는 사람도 있는지 만지 해야 한다.
흑백이 서너 점 떨어지면 벌써 천하의 대세는 결정되는 성싶다.
바둑은 서너 점 흑백이 어울릴 때부터 벌써 긴장되기 시작한다.
적의 포위하려는 의도가 어느 편에 집중된다는 눈치를 채게 되면, 그 포위망을 피하는 데 대개 두 가지 길이 있다.
우리 같이 서투름뱅이는 어떡하든 고립시키지 않으려고 援軍을 不絶히 보내는 것이나, 능한 사람이 두는 걸 보면 완전히 적의 의도를 무시하고, 孤軍이 포위를 당하거나 적이 공세를 노골적으로 보이거나 할 것 없이 모르는 체 하고 왕청스레 딴 짓을 한다. 그렇게 하는데도 한참 두다 보면 좀체로 고군이 죽는 법도 없거니와, 假使 한두 점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극히 적은 희생에 그치고 엄청나게 큰 이익을 거두는 수가 많다.
“하하아.” 바둑을 두다 말고 나는 흔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세상 일도 이러한 것이렷다.
지식이 빈곤한 사람들이 근거리의 利害밖에는 볼 줄 몰라서, 심하면 자기 일신의 영달에 그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네 가족의 영화나 기껏 멀리 본 대야 자기 一派黨의 이익밖에는 옹호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國手는 결코 작은 이익에 머무르지 않는다. 좀 더 시야를 널리 해서 한두 점이 희생을 당할지언정 ‘大馬’를 절대로 죽이는 법이 없다.
남은 계획을 딱 세워 놓고 차근차근 두어 가는 판에 성미 급한 싱거운 관전객은 중뿔나게 훈수를 든다.
상대편이 苦境에 빠져 어쩔 줄 모르고 어물거릴 때 “거기 놓으면 쓰나, 여기다 놔, 여기다···” 하고 要衝을 일러 주는 싱거운 훈수꾼이 있다.
이것이 몇 점의 이해라면 모르겠는데, 가다가는 형세가 역전하여 승부가 금방 뒤집히게 되는 경우에 이런 싱거운 훈수가 들어올 때는 딱 질색이다.
그러나 사람의 性癖이란 또 우스운 것이어서 번연히 자기 실력이 부치는 줄 알면서도 훈수를 듣고서 부득부득 제가 이겼다고 우기는 비겁한 친구도 곧 많다.
관전꾼의 동정이 어디로 모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경우에 제 돈을 내어서까지 훈수를 드는 친구도 밉살스러워 보이지만, 남의 힘을 빌려 자기 수를 건성 높이려 드는 뻔뻔이들은 한층 더 침이라도 뱉고 싶다.
비겁하단 말이 났으니 말이지, 바둑을 두는 도중에 걸핏하면 물러 달라는 친구를 대할 때는 진정 견딜 수 없다. 그것도 점잖게 두다가 정 억울한 대문에 한번쯤 물리자면 또 容或無怪이겠는데, 이건 처음부터 갖은 잔소리를 다해 가면서 놓았다 들었다 찧고 까불다가 한 마리만 걸려도 물러 달라, 두 마리만 잡혀도 물러 달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제 해만 아니 죽이겠다고 악을 쓰는 친구가, 상대편은 스무 번에 한 번만 물러 달래도 화를 벌컥 내면서 “그따위로 둘 테건 바둑 그만 두자”고 꽥꽥거리는 못난 이들을 곧잘 본다.
이건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는 ‘하오불’이라 置之度外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데, 이런 친구일수록에 게다가 또 모략을 쓰는 것이란 장관이다.
얕은 속임수로 적을 농락을 하려 든다.
모르는 체 하고 속아 주면 제가 젠체하고 네 활개를 치다가, 가다가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수도 없지 않은데, 그리고서도(그러고서도) 똥 뀐 년이 성낸다는 격으로 제 편에서 감정을 품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다.
이런 친구들을 볼 때는 바둑을 두다 말고 나는 곧잘 친일파를 연상한다.
바둑이란 두어 보면 여러 가지 버릇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스레 무당년 뒤풀이하듯 중얼거리기만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저 바둑돌을 놓았다 들었다 놓았다 들었다 어쨌든 안절부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누가 훈수나 아니 해 주나 하여서 멍하니 관전객의 눈치만 기다리고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 천태만상으로 버릇들이 다르지만, 이러한 버릇들은 대개 일러 주기도 하고 자기도 조금만 조심하면 곧 고칠 수도 있는 것이나, 자꾸 무르기를 좋아하는 바둑은 좀체로 고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결국 한 대 다부지게 얻어 맞고서야 고칠 것인지?
한데 내가 바둑 이야기를 늘어놓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아마 그 자가 바둑깨나 두는 게로군 할지 모르나, 실토를 할 양이면, 바둑이란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하는 것인데, 내 바둑은 내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서 처음으로 붙잡았고, 그도 한 반년인가 배우다가 집어치우고 말았다가 작금 양년에 들어서 세상이 하도 뒤숭숭하기로 消憂 삼아 다시 바둑돌을 들게쯤 된 터이라, 누가 그러는데 내 바둑은 수로 論之한다면 아마 십삼 급은 되리라고. 그리고 보니(그러고 보니) 학력으로 친다면 유치원 이년생쯤은 되는 셈이다.
그런데 무슨 바둑 이야기를 그렇게 늘어놓느냐고 大方家들은 高聲叱責할지 모르나, 그러나 반드시 國手들만 바둑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큰 오산이라, 우리 같은 문외한은 문외한대로의 경청할 만한 경험담이 또 있는 것이다.
바둑을 두어 본 중에 제일 골딱지가 난 것은 가령 이러한 경우다.(그래서 나는 좀처럼 내기 바둑을 두지 않는 것이지만) 초대면해서 둘 때는 감쪽같이 자기 수를 숨기고 못 두는 체 하고서 일승 일패로 겨누던 자가 “우리 심심하니 내기나 겁시다” 하는 걸 체면에 싫달 수도 없고 해서 그럼 그러자고 단 몇 푼이고 돈을 걸기만 하는 때는 그만 엉뚱하게 原 수를 쏟아 놓아서, 여지없이 거꾸러뜨리고 주머니 돈을 닥닥 긁어 가는 자가 있다.
알고 보면 이런 자는 돈을 따먹기 위해서 초면에는 좀처럼 자기 수를 보이지 않고 약한 체 하다가 내기를 걸도록 유혹을 해 놓은 뒤에는 본격적으로 덤벼들어 있는 대로 상대편의 돈을 훑어 간다는 것이다.
악질이다.
간사한 놈들이다.
갖은 감언이설로써 아첨을 다 하다가, 일단 有事之秋에는 교분이고 의리고 헌신짝처럼 집어 치우고 利害로써 맞서는 세속배와 같은 자들이다.
바둑이란 것은 꽤 재미나게 된 노름이라 가령 장기 같으면 소위 군왕 비슷한 ‘장군’이란 놈이 떡 버티고 앉았으면 그놈을 포위하는 ‘士’라는 호위병이 있고 무슨 ‘車’니 ‘包’니 ‘馬’니 ‘象’이니 ‘卒’개니 하는 것들이 죽 늘어서고, 각기 소임이 달라서 제 몸을 가지고도 제 자유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꼴이, 꼭 봉건군주제도와 같아서 나는 장기나 장기를 두는 꼴만 보아도 그만 판을 들어 엎고 싶도록 미워지는 성미인데, 바둑만은 그렇지 않아서 장기처럼 무슨 老紅少靑이라 하여 年上輩라고 홍을 쥐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실력(수)이 높은 사람이면 십 년, 이십 년 아래 친구일지라도 白을 주는 법이요, 수가 모자라면 제 손자뻘이라도 黑을 쥐어야 하는 것이 평민적이라서 좋고, 또 장기처럼 그 개떡 같은 권력의 집중체인 ‘장군’이라든가 차니 포니 마니 상이니 졸개니 하는 계급별이 없어 좋고, 그저 흑이면 흑, 백이면 백, 모조리 동글납작하여 大小貴賤이 없는 꼭 같은 모양들인 것이 좋고, 또 장기처럼 敵陣이니 내 진이니 하는 천하를 양분하는 지역별이 없이 바둑판 네 구석에 아무데나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집을 짓고 살 수도 있고, 돌들이 아무렇게나 뛰어다니며 활보를 해도 行步의 부자유가 없어 첫째 시원하다.
무엇보다 시원한 것은 아무리 저편의 영역 안이라도 내 실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뛰어들어가서 집을 짓고 살 수도 있고, 제 아무리 頑敵이라도 조금도 그것을 방해 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올 수 있으면 얼마든지 와서 살라고 환영한다.
어디까지 상대편의 실력을 존중하고 정당하게 싸운다.
만일 한편에서 고군이 力戰하다가 실패를 하였을지라도 다른 편에서 다시 敗勢를 회복하는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실패한 것이라도 전체적으로 승리를 얻는 수도 많다.
장기라면 이런 것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
한 놈의 ‘장군’을 위하여 數多한 군졸들이 발 한번 옴쭉 못해 보고, 백기를 들고 마는 장기와는 판연히 다르다.
요새 청년들이 ‘마장’이나 ‘카드’로 밤을 새우고 시간을 낭비하면서, 어찌해서 그 좋은 바둑을 敬而遠之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길이 없다.
골치 아픈 老子의『도덕경』한 페이지를 읽는 대신에 모름지기 바둑판 위에서 인생을 배우는 것이 한층 더 첩경이 되지 않을까 싶다.
-金瑢俊, 새 近圓隨筆(열화당, 2009), 163~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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