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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살을 먹으며 | 문학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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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살을 먹으며
글쓴이 꽃필무렵   조회 1164

올해도 어김없이 설은 찾아왔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한살을 먹었다.
벌써 환갑이 지났고 이제 또 어어 하면 바로 두보(杜甫)가 말한 고희(古稀)이니 세월은 정말 빠르다.
이렇게 알아서 빨리 가는 세월에게 한 때는 세월이 어서 빨리 가기를 바란 적도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었다.

朝回日日典春衣 조회일일전춘의
每日江頭盡醉歸 매일강두진취귀
酒債尋常行處有 주채심상항처유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조정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잡혀 놓고
매일 강가에서 만취하여 돌아오네
가는 곳마다 술빚은 있지만
인생 칠십 살기는 옛부터 드문 일
(두보의 曲江二首 중에서)

인생 칠십이 古來稀라...
물론 두보 시절에는 인생 칠십 살기가 드문일이었겠지만 요새는 90세 넘은 할아버지가 운동 경기에 참가했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이니 환갑이 넘어도 아직은 청춘이라 위안 삼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위안을 삼기는 해도 가슴을 뛰게 했던 많은 것들이 하나,둘씩 없어져 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월의 잔인함이다.

달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거리에 어둠이 깔리고 들녘을 수놓은 노을도 하나 둘씩 잠들어 가면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비로서 자신의 등불을 켠다.
어릴 때 동선동이라는 곳에 살았었는데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자그마한 산이 있었고 여기에 자그마한 사찰(사찰??탑골승방의 산하 승방??)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사찰이 있던 산은 작지만 제법 나무들로 우거진 숲도 있었고 시냇물 졸졸 흐르는 조그마한 계곡도 있었는데 그 속의 승방(?) 같은 곳에 꼭두새벽에 가끔 갔었다.
당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이모님이 집 근처에 살아 이모님 따라 같이 갔던 것이었다.
물론 새벽이라 인적도 없고 산 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시냇물 졸졸 흐르는 소리와 스님들의 독경 소리 뿐이었다.
아마 이 때 이런 풍경을 창백하게 비춰주는 달빛이 없었더러면 어린 나이에 졸린 눈을 비벼대며 굳이 새벽에 여기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빛은 창백해야 제맛이다.
붉으스름하게 화장을 하고 따뜻한 미소로 감싸주는 달빛도 물론 좋지만 역시 달은 역시 창백하고 시린 모습으로 비춰야 제대로의 운치가 난다.
그 때 어린 나이에 왠지 모르지만 은은하고 창백한 달빛 속에서 시냇물 졸졸 흐르는 소리와 스님들의 독경 소리도 좋았고 달빛을 받으며 바람에 살랑대는 숲 속의 나뭇잎도 좋았다.
그리고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진다는 지훈의 표현을 배우고서야 비로서 그때 막연히 나뭇잎이 달빛을 받으며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이 좋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마 달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렇게 어릴 때 부터인가 싶다.
하지만 목마를 타고 떠나버린 숙녀처럼 달의 여신도 어느날인가 갑자기 세월이라는 마차를 타고 훌쩍 떠나니 세월은 참으로 피도 눈물도 없이 달도 빼앗아 가고 말았다.

벚꽃은 날리고 배꽃은 내리는 것.
그래서 봄날 벚꽃에는 벚꽃의 눈이 날리고 배꽃에는 배꽃의 비가 내린다.
날리는 벚꽃의 눈속에는 만남이 있고 내리는 배꽃의 비속에는 별리가 있다.
그래서 날리는 벚꽃의 함박눈과 함께 쌍계사 십리길은 같이 걸으면 인연이 맺어진다는 혼사길이지만 내리는 배꽃의 비 속에서 울며 잡고 떠난 님은 야속하게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梨花雨인 모양이다.
이별의 눈물이 배꿏의 비가 되어 내리니 梨花雨다.
하지만 가슴 뛰던 만남도,시리도록 애절했던 별리도 이제는 빛바랜 사진접 속의 추억으로만 있으니 세월은 아쉬운 것도 많이 가져가 버렸다.

소슬하게 뿌리는 이슬비 한방울에도 상념의 눈물을 흘리는 소녀의 마음을 이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고,돌담 사이길을 걷는 여인네들의 화사한 옷차림에서도 봄의 향내를 미처 맡지 못하며,달을 벗삼고 별을 벗삼아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노래를 들어도 가을이란 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으니 도대체 세월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하지만 이제는 세월의 고마움도 느끼게 된다.
때때로 아내 없이 혼자 집에 남겨질 때 왠지 모를 허전함이 엄습해 오면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에서 애틋함이 느껴질 때 세월 따라 자책과 회한도 그만큼 늘어만 간다.
인생에서 가장 친하고 소중한 친구는 아내라는 것을 세월이 알게 해 주었으니 세월은 이렇게 고마운 짓도 한다.

라일락의 짙은 향내에서 이제는 가을철 국화 같은 은은한 향취가 묻어 나는 친구를 보는 것도 세월의 고마움이다.
검은 머리로만 알았는데 어느날 염색이 지워져 허옇게 서리가 내린 반백의 친구의 모습에서 왠지 더욱 정감있고 친근한 모습을 발견한 것은 세월이 흘러 간다는 것이 과히 나쁘지는 않다는 증거이다.

하찮은 것,사소한 것이 때로는 거창하거나 화려한 것보다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며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진실이 사람의 질을 결정힌다는 것도 세월이 알려 주었으니 세월은 인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생이 무엇인지를 짐작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도 인생의 초보자인데 세월이 모든 것을 더 알게 해 줄 것이니 오는 세월을 그저 반갑게 맞이 해야겠다.

 

┃꼬릿글 쓰기
비카푸리오 | 2018-02-20 오전 11:29  [동감 0]    
은은한 한편의 수필을 읽은 느낌입니다. 광장에 올리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술파는꽃집 | 2018-03-09 오전 1:15  [동감 0]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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