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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浮生六記 14 | 문학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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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浮生六記 14
글쓴이 윤실수   조회 162
2001년에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 사건은 수천명이 희생을 당하였지만 강건너 남의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여파가 내게도 미칠줄이야!
2002년 나는 오랫만에 아들 준이를 보러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도 나는 캐나다를 경유하여 미국에 입국할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벤쿠버의 공항에서 뜻밖에도 이민국 공안이 내게 수갑을 채우는것이 아닌가?
캐나다는 인권의 국가임을 잘 알기에 나는 그들 책임자에게 강력 항의하였다.
알고보니 911 테러 이후 캐나다도  미국과 공조를 하여 입국 심사를 엄격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내에서 폭력전과가 있는 나를 입국시킬수 없다는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날 즉각 추방시키면 그만이지 내게 수갑은 왜 채운단 말인가?
그들은 어이없게도 나의 인권보장을 위해서라고 설명하였다.
그들은 나를 일단 밀입국 혐의로 체포하여 공항에 억류한후  추방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간동안 나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캐나다 당국에 체류허가 신청을 할수 있다는것이다.
나는 변호사까지 선임하여 미국에 입국할 이유는 없었기에 변호사 선임을 포기했지만 캐나다가 인권국가임을 잘 알수 있었다.
따라서 일시 억류라고는 하지만 억류자들에겐 자유로운 숙박 시설에 식사등 처우도  좋은편이었다.
그곳에는 캐나다에서 불법체류중 체포되어 추방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미결수들이 여럿 있었다.
말이 미결수이지 캐나다에서 불법체류는 경범죄에 해당하기에 처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 미국 청년은 평화공원에서 국경을 무단 횡단하였다는 죄목으로 억류되었는데 911사건 이전에는 상상도 할수 없는 강경 조처였다.
911 사건으로 평화롭던 캐나다 미국간의 국경에도 단속이 강화된 것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처럼 911사건은 더욱 많은 사람을 나 처럼 이산가족으로 만들었다.
나의 경우 준이가 한국에 오지 않는다면 그를 만날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준이는 한국에 오기를 극도로 싫어하였다.
어릴적 한국에서 잠시 생활하는 동안 준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모양이다.
준이는 미국에서 나고 자랐기에 한국어에 능숙치 못했으니 그것이 왕따를 당하는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 조기유학붐이 일어 이산가족이 된 가정이 많지만 나의 경우는 미국에 출입을 할수가 없으니 안타까웠다.

2002년 12월에는 노무현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이변이 발생하였다.
내가 이변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의 지나온 성장배경 때문이었다.
물론 전직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도 우리 세대에겐 매우 경이적인 일이었다.
암울했던 유신시대에 대학생이었던 나는 이후의 소위 군사독재시절까지 모두 체험하였다.
5공시절에 김대중 선생이 사형언도를 받자 무지한 사람들은 "저런 놈은 죽여야 해!'라고 까지 하였다.
따라서 김대중 선생이 훗날 민선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세대에게는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노무현씨는 대법원장 출신으로 총리를 지낸 이회창 후보를 꺾었으니 이변이 아닐수 없었다.
2002년은 내 나이 만 50이 되던 해였다..
50년이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나는 모든 정치적 격랑을 두루 체험한 보기 드믄 세대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나 에겐 또 다른 흥미를 선사하였다.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한 참모진중엔 안희정씨가 돋보였는데 그는 중학시절 나의 제자였다.
나는 사범대학을 졸업하였지만 교직경력은 단 2년뿐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에 만났던 안희정 군과의 교류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안희정군은 우등생임에도 운동을 좋아하여 연무대 중학교 농구부 주장까지 지냈다
나는 체육교사였기에 농구부 감독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교류를 이어오던 안군이 정치인이 되었기에 반가웠지만 한편 우려스럽기도 하였다.
그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으나 아직 현역 정치인이기에 언급을 자제하겠다.
.
나는 팔자가 드세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였지만 그럼에도 재혼생활이 행복할수 있음을 알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나의 고향 마을은 625떄 좌우의 극심한 대립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과부의 숫자가 부근의 어느 마을 보다도 많았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재가를 한 여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숫자였다.
조선시대의 재가금지 풍습이 625 이후에도 잔존하여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재클린 여사가 미망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을 한것에 비한다면 얼마나 대조적인가?.

나이 오십이 되니 오십견 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내게도 찾아왔다.
나는 즐기던 골프는 커녕 팔의 움직임 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여가 시간엔 할수없이 그간 찾지 않았던 기원을 다시 찾을수 밖에 없었다.
마침 서울엔 영등포의 마사회 빌딩에 대형 금연기원이 생겨났다.
나는 담배연기를 싫어 하기에 금연기원의 출현을 고대했었다.
하지만 흡연 인구가 절반이 넘는 한국에서 금연 기원은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등포의 금연 기원은 손님으로 북적였다.
하지만 금연기원임에도 여성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바둑은 좋은 취미이긴 하지만 남녀가 함께 즐길수 있는 게임이 아니기에 문제이다
남녀가 함께 즐기기엔 여성 바둑인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인 것이다.
 아내 역시 바둑을 둘줄 몰랐기에 내가 기원에 출입하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따라서 화목한 가정 생활을 위하여 나는 가족이 함께 즐길수 있는 취미생활을 택하지 않을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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