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o 세계 인터넷바둑의 허브
  • 겜임&채널
신 부생육기 13 | 문학게시판
Home > 커뮤니티 > 문학게시판
신 부생육기 13
글쓴이 윤실수   조회 98
99년 여인은 건강한 딸 아이를 출산하였다.
여인과 나는 이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떳떳한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그간 우리는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왔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여인이 어떻게 첩살이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제 얼굴에 침뱉기 이기에 나로선 연숙이 간통을 하였다고 까발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연숙은 미국으로 떠났고 여인은 나의 아이를 낳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남들의 구설수에 오를일도 없었던 것이다..
늦둥이를 보아 여인과 내가 깨가 쏟아지던 어느날 연숙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혼만은 안된다던 연숙이 우릴 위해 이혼을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로선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이혼서류를 정리 하기 위해서는 내가 필히 미국에 다녀와야만 하였다.
연숙과 나의 결혼생활은 이미 십년이 넘은데다 슬하에 아들까지 두었기에 이혼절차가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어느 나라던 결혼은 쉽지만 이혼절차는 까다로운 법이지만 미국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연숙의 경우 내가 한국에 있다는 구실로 법원에 일방적 이혼을 청구할수도 있었지만 그럴경우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등 시간괴 비용이 적지 않게 들었다.
따라서 이혼 당사자인 내가 나타나 협조를 해야만 이혼절차가 쉽게 마무리 되는 것이다.
 연숙은 미국 입국거부를 당한 적이 있는 내게  캐나다를 통한 밀입국을 권유하였다.
연숙은 미국땅을 처음 밟을떄  밀입국을 한 경험이 있기에 그런 편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캐나다행 비행기 기내에서 나는 미국과의 국경선에 위치한   검문소를 어떻게 통과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지만 자통차를 몰고 토론토 공항에 도착한 연숙은 근심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북미대륙의 서부에는 평화공원(Peace park)이 조성되어 있는데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선이 공원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공원은 이름에서 보듯 양국의 평화적인 관계j를 상징하기에 국경선에 아무런 장애물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양국인 누구나  자유로이 국경선을 넘어 왕래할수 있는 것이다. 
이중 삼중의 철조망으로 가로 막혀 있는 한국의 휴전선과 비교할떄 나는 그곳이 부럽기 그지 없었다.
미국과 캐나다는 서로 다른 국가임에도 국경주변이 이토록 평화스러운데 한반도는 동족끼리 첨예하게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비극인 것이다.
나의 외가쪽은 이북출신이기에 나로선 한반도의 현실이 더욱 안타까운 심정이다.
우리는 이혼절차를 가급적 빨리 끝내야 했기에 함께 네바다 주의 리노(Reno)로 향하였다.
리노는 이혼절차가 미국내에서는 가장 간단한 도시이기에 go to Reno는 "이혼하다"라는 뜻을 가진 관용구가 되어 영어사전에도 등장한다.
근처에는 타호(Lake Tahoe)라는 빼어난 절경의 천연호수가 있어 사람들이 이혼여행을 하기도 한다.
리노시의 법정에서 속성으로 이혼판결을 받은후 연숙과 나는 레이크 타호에 위치한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 투숙하였다.
호텔은 공교롭게도 연숙과 내가 처음 만났던 라스베가스의 호텔과 같은 이름이었다.
아마도 두 호텔이 같은 체인인것 같았다.
"영화를 보니 미국인들은 이혼후에도 서로 원수지간으로 살지는 않더군요!"
연숙이 내게 말하였다.
"원수 질 일이 무에 있겠오!  더구나 우리 사이엔 아들 준이가 있는데..."
"준이 양육비는 계속 보내줄 거죠?"
"그럼! 내 자식의 교육비를 내가 보내지 않으면 누가 책임을 지겠오!"
"사람은 보지 않으면 멀어진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하는 말이죠!"
'내가 늦둥이로 딸을 얻었지만 나는 한국사람이요! 한국 사람에겐 뿌리깊은 남아 선호사상이 있음을 당신도 잘 알지 않소?" 
사실 나는 남아선호 사상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지는 연숙에게 안심을 시켜주기 위해 그렇게 말홰 주었다.
나의 말에 감동을 하였는지 연숙이 내게 안겨왔다.
우리가 헤어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운우지정을 나눌법도 하지만 나는 통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연숙의 간통사건은 그토록 내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금문교(golden gate)를 함께 걷고 싶다는 연숙의 청 마져 거절할수는 없어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LA로 내려왔다. 
아들 준은 그간 연숙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댁에서 신세를 지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13세 이하의 미성년자를 혼자 있도록 방치할수 없다.
따라서 잠시라도 반드시 후견인에게 맡겨놓아야 하는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내게 내게 준은 이해할수 없다는듯 불만스레 물어왔다.
"아빠는 왜 한국에 따로 살아요? 새로 만난 아줌마 때문인가요?"
"꼭 그런건 아니야! 너에겐 미국이 좋듯 나에겐 어린 시절을 보낸 한국이 더 좋기 때문이지"
아직 십대 초반의 미성년자이기에 준은 우리의 이혼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미국의 경우 주위에서 이혼한 가정을 심심치 않게 목격하지만 준은 자신의 부모가 이혼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고 하였다.
생각 같아선 나도 그런 준이와 함께 살고 싶었지만 현실은 생업과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한국으로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입국시의 심사는 까다롭지만 출국 심사는 아예 없다
따라서 중법죄를 범한 범법자가 아니라면 공황에서 출국금지를 당할 일은 없는 것이다.
나 같은 이민자들이 츨신국으로 영주귀국을 한다면 오히려 환영을 하는게 그들이다...
나는 연숙에게 준을 신신당부 하고는  미련없이 미국을 떠났다.
그런데 그때의 작별이 그들과 나의 마지막 만남이  될줄은 나는 까맣게 몰랐다. 
계속  
┃꼬릿글 쓰기












* 띄어쓰기 포함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000 / 400바이트)
대국실입장하기
다운로드 이용안내 고객센터
정회원가입
오로볼구매
댓글이 가장 많은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