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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浮生六記 12 | 문학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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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浮生六記 12
글쓴이 윤실수   조회 120

연숙이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고 나니 그제서야 연숙의의 빈자리를 실감할수 있었다.
연숙이 마치 가정부처럼 나의 뒷바리지를 한데 비해 새로운 여인은 아내라기 보다는 연인에 가까웠다.
따라서 연숙과 주로 가정사를 얘기했다면 여인과는 문학 에술 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주로 나눴던 것이다.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는 우리가 와인잔을 부딪히며 즐겨 외치던 레파토리였다.
여인과 나는 말하자면 제2의 사춘기를 뒤늦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조기유학이지 아들의 경우는 미국에서 태어난 네이티브 아메리칸 이기에 학업을 마친 후에도 한국에 다시 돌아올리 없었다.
아들 준은 여덟살 까지 미국식 교육을 받았기에 한국식 교육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이 부모의 나라이긴 하지만 미국생활을 더 좋아하는 아들이 한국에  다시  돌아올리는 만무한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이민 2세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조국은 미국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나는 놀랐다.
그렇다면 일제 시대에 태어났던 조선인들도 철없이 그런 생각을 하였던 것은 아닐까?
중국에서 태어난 조선족들이 자신들은 비록 조선족이지만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는것을 보면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것이다.

아내가 그렇게 떠나고 나자 여인과 나는 불륜의 관계에서 벗어나 정식 부부가 된 느낌이었다..
게다가 호적에도 혼인신고가 버젓이 되어 있으니 외견상으로는 완벽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치 대변을 보고 밑을 씻지 않은것 처럼 왠지 개운치 못하였다.
해방후 자진 월북의 길을 택한 한 많은 인사들도 나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대다수의 월북인사들은 처자를 남쪽에 두고 혈혈단신 월북을 하였다.
휴전선으로 남북이 가로 막히자 그들은 북에서 다른 여인과 재혼을 할수 밖에 없었다.
남쪽에 처자가 시퍼렇게 살아있었으니 법률상으로도 중혼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가족법은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다.
게다가 헌법상 북한도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따라서 월북인사들은 거의 모두가 법률상 중혼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북 분단의 결과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경우도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던가?
아내가 간통을 저질렀기에 그랬노라고 합리화 한다면  마음이 편해야 하건만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여인 역시 연숙이 멀리 떠났음에도 나와 마찬가지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뒷간에 갈때와 올때가 서로 다른 법이예요. 연숙씨가 언제라도 마음이 변한다면 우리는 중혼죄로 처벌을 받게 되는것 아닌가요?"
"내가 매달 생활비를 꼬박꼬박 부쳐 주는데 연숙이 무엇하러 한국에 되돌아 오겠오? 연숙은 미국에 좋아하는 남자도 있기에 그런일은 절대 없을거요!"
"여자가 바람 한번 피웠다고 상대를 좋아한다고 단정은 마세요. 여자도 단지 성적 욕구로 외도를 할수도 있으니.." 
그러던 차에 어느날 연숙으로부터 다급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아들 준이 운동을 하다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대로 나는 열일 제치고 급히 미국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내가 LA의 탐 브래들리 국제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려던 순간 입국이 불허되었다.
사유는 미국 체류시 구치소 출소후 내가 의무 사항인 순화교육을 이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민국 직원은 내가 자진출국을 하지 않을 경우 경찰에 체포될 것이라고 내게 일러 주었다.
아내에게 뺨 한대를 때린 죗값이 이토록 두고 두고 나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연숙과 준은 얼마나 눈이 빠지도록 날 기다렸을 것인가?
가정폭력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한다는 법의 취지가 지나쳐 도리어 가족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법적용에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헛걸음을 친 나에게 여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뺨 한대로 남편의 화가 풀린다면 한국의 여인들로선 그편이 낫지 이혼을 당한다면  도리어 그게 더 큰 문제이겠죠!"  
그일로 인하여 아들 준은 나를 무척 원망하게 되었다.
연숙은 준에게 나의 일을 곧이 곧대로 말할수 없어 다른 핑게를 댄 모양이었다.
어린 준은 아들이 중상을 입었는데도 바쁘다는 핑게로 병원을 찾지 않은 아버지를 이해할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부자간의 거리는 태평양의 길이  만큼이나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 내가 안쓰럽던지 여인은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까짓  미국에 못 가는게 뭐 그리 대수인가요!  대신 우리 언제 유럽 여행이나 갑시다!  당신은 미국에서 십여년간이나 살았으니 더 이상 그곳에 뭐 볼게 있겠어요?"
여인은 눈엣 가시인 나의  전처와 그 소생을 내가 자주 만날수 없다는게 한편 다행이겠지만  내색은 할수 없어 그렇게 위로를 하는듯 하였다.   
그러나 여인은 한번 한 약속은 지키는 성미이기에 훗날 유럽 여행을 함꼐 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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