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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浮生六記 10 | 문학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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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浮生六記 10
글쓴이 윤실수   조회 128
십여년 이국생활 끝에 빈털털이로 한국에 돌아왔기에 나는 사업자금으로 친인척의 도움을 받으려고 생각하였다.
부모님은 슬하에 7남매를 두었는데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내가 많은 돈을 나도 모르게 은행에 저축해 놓고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미국의 식당에서는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주는게 오래된 관습처럼 되어있다.
보통은 음식값의 15내지 20% 정도를 팁으로 테이블에 남겨 놓기에 주류와 음식값이 비싼 일식집의 경우 팁도 적지않은 액수가 된다.
아내는 웨이트리스 생활을 십년 가까이 했으니 남몰래 저축한 돈이 티끌 모아 태산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영주 귀국을 할 당시는 공교롭게도 IMF 사태로 환율이 달러당 2천원까지 치솟았었다.
따라서 연숙이 모은 20만 달러는 한화로 4억원이나 되었다.
그 당시엔 아파트 가격도 대폭 하락하고 임대료도 낮아졌기에 우리 부부는 그리 많지 않은 돈으로도 강남에 자리를 잡을수 있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당신에게도 쓸만한 구석이 있었군!"
"내가 당신을 위해 저축을 하였나요? 아이를 위해 그간 짠순이 노릇을 했을 뿐인 걸!"
여인들의 모성애란 상상을 초월하였다.
나의 경우 돈이 생기면 골프를 치거나 부근의 명승지로 놀러 다니기 바빴다.
캘리포니아 인근엔 경치 좋은 국립공원이 즐비하고 그랜드 캐년도 그리 멀지 않아 심심하면  홀로 차를 몰고 떠나기 일쑤였다.
가끔은 개고기가 먹고 싶어 친구와 멕시코까지 차를 달려가 보신탕을 즐기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개고기 판매는 불법이기에 단속이 느슨한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와나에 어떤 한인이 보신탕집을 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와는 달리 돈이 생길때 마다 훗날에 대비해 은행에 저축을 했던 것이다.
강남에 새로 차린 일식집에서도 손님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던지 아내덕에 가게는 금방 자리를 잡아갔다.
내가 없는 사이 한국에서는 신설대학이 대폭 늘어나 나의 대학동기들은 어느새 절반이상이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일식집 주방장이나 하고 있는 내게도 교수직을 알아보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나는 박사 학위도 없는데 어떻게 교수가 된단 말이지?"
"학위야 하나 만들어 오면 그만 아닌가? 자네는 모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학위를 위조해와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걸세.  게다가 미국생활도 오래 했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내가 미국을 떠날 즈음 LA의 한 브로커가 내게 접근해 박사학위를 위조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었다.
현금 만달러만 지불하면 예일대 같은 명문 대학의 박사학위 증명서를 감쪽같이 위조해 줄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식집 주방장으로 맘 편하게 살갰다며 브로커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런데 나의 동기중 한 친구는 미국대학의 학위를 위조하여 서울의 한 명문대에서 버젓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가 미국에서 잠시 유학생활을 한건 사실이지만 수년간을 골프나 치며 건달처럼 지냈던 사실을 잘 알기에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얼마후 그 친구가 근무하던 대학에서 파면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학위 위조가 들통나 그런줄 짐작했지만 알고 보니 뜻밖에도 간통사건 때문이었다.
재직하던 대학에서 골프 강좌를 맡고 있던 친구는 골프를 즐기는 상류층 유한부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나 보다.
그러던 중 한 유뷰녀와  스캔들이 일어났고 그 사실이 대학에까지 알려져 사퇴를 강요당하였다는 것이다.
친구가 그런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명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학위를 위조해 교수가 된 사람이 한국에 비단 그 친구뿐이 아님은 훗날 터져버린 신정아 사건을 보아도 잘 알수있다.
신정아 사건도 그떄 우연히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묻힐 뻔 하지 않았던가?
내가 한국에 돌아온 이유중의 하나는 문민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는데 아직도 한국사회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있었다.
청와대 수석인 변양균씨 조차도 이중생활을 하며 신 여인에게 속았을 정도이니 말하면 무엇하랴!
일식집이 번성하자 나는 주방장을 고용할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나는 어느덧 4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었기에 일은 적당히 하고 취미생활을 즐기고 싶었다.
IMF사태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생활수준은 한층 높아져 골프를 즐기는 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에 중산층 여성들 사이에서도 골프 붐이 조성되고 있었다.
하루는 강남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내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혹시 윤선생님이 아니신가요?''
나는 도미 하기전 석사학위를 마치고 잠시 대학의 시간강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여인은 교양체육 과목으로 내게 테니스를 배웠다고 하였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 하긴 하지만 여인은 분명 어디서 많이 본듯한 얼굴이긴 하였다.
"제가 83년경 올림픽 조직위로 선생님을 찾아 갔었는데 그래도 기억이 안 나세요?
여인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상기시켜 주자 비로소 어느날의 사건이 내게 떠올랐다.
83년 내가 대학강사직을 그만두고 올림픽 조직위에 입사하자 당시 대학 2학년이던 여인이 날 찾아와 맥주를 사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그날 서로 술이 과하다 보니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함께 호텔잠을 잤던 일이 떠올랐다.
내게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따로 있음을 안 그녀는 그후 다시 날 찾지는 않았다.
그런데 서울은 좁기에 십여년만에 그렇게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98년 당시만 해도 골프 연습장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우리가 우연이지만 그렇게 마주쳤던 것이다.
여인의 골프 실력은 초보를 겨우 벗어난 수준이었기에 그녀는 십년 경력의 나를 대단한
골퍼인 양 부러워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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