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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스도형님   조회 76 수정일 2018-06-07 오후 10:39:00

 

 

 

 

 

 

 

 

 

 

 

 


[곡명] Triodust - Valle De Los Cadose

 

 

 

 

<큐비트>

 

 

 

기존의 고전 방식의 컴퓨터는 어떤 명령이 도착하면 O / X 라는 2진법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즉 명령 1개에 O/X 푯말을 가지고 있다가 O를 들었다가 X를 들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정보 처리가 느렸습니다. 

 

 

 

 

 

 

반면 양자 컴퓨터의 정보 처리를 담당하는 큐비트는 O/X 표가 하나의 푯말에 다 그려져 있습니다.

동시에 여러가지 명령을 내려도 그에 맞게 O로 대답하고 X로 대답합니다.

이렇게 푯말 2개를 쓰는 것이 아닌 하나로 처리할 수 있죠.  푯말을 내리고 올릴 필요도 없이 그냥 명령에 답을 바로 합니다.  따라서 푯말을 내리고 올리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양자 컴퓨터는 이렇게 이 전자에 0과 1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양가적인 상태중첩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계산 도구로 활용하는 전자를 큐비트(Qubit)라고 합니다.

큐비트 2개가 뭉치면 00, 01, 10, 11이라는 정보를 담을 수 있는데

큐비트 2개가 뭉친 큐비트가 많아지면 정보 처리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먼 거리에 있는 양자끼리 동기화 되는 양자 얽힘(Entanglement)

 

 

이 양자 얽힘은 큐비트 2개를 쌍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큐비트 2개를 엮으면 양자 얽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양자 얽힘은 2개의 큐비트가 동기화 되어서 하나의 큐비트의 움직임에 따라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A,B라는 큐비트가 양자 얽힘으로 쌍을 이룬다고 칩시다
A라는 큐비트가 1로 보이게 하면 B도 즉각적으로 1로 보입니다.

반대도 가능합니다.
A라는 큐비트가 1로 보이게 하면 B는 바로 0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즉 반대로 작동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0도 1도 아닌 큐비트가 한 순간에 확실하게 1로 보이거나 0으로 보이게 할 때 동시에

양자 얽힘 상태에 있는 큐비트가 동시에 0이나 1로 확실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2개의 큐비트의 양자 얽힘을 이용해서 00, 01, 10, 11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동시에 관측 했을 때 두 큐비트가 0도 1도 아닌 흐리멍텅한 확률이 아닌

명확하게 0이나 1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죠. 

큐비트 하나는 상태중첩, 큐비트가 둘이면 양자 얽힘이 작동합니다.

 

이 양자 얽힘으로 이루어진 큐비트를 계속 늘리면 2의 N승으로 처리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집니다.

 그래서 구글 양자 컴퓨터가 PC보다 1억배 빨리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양자컴퓨터는 큐비트 연산을 한다. 중첩은 한 입자가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로

 0과 1로 4가지(00,01,10,11) 상태를 표시할 수 있다. 그래서 n개의 큐비트로는 2의 n제곱 수 만큼 표현할 수 있다.

 0과 1의 비트를 사용하는 컴퓨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빠르다.

 인간이 수백 년 동안 계산하는 수식을 수초 만에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전자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중력, 전자기장, 진동 등의 외부의 거시적인 물리 역학에 영향을 받아서 안됩니다.

이런 전자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연구가 계속 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실용적인 양자 컴퓨터는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구글과 나사가 함께 소개한 양자 컴퓨터도 완벽한 양자 컴퓨터가 아니라는 소리도 많죠.


올해 초 MIT의 과학기술 전문지 ‘테크놀로지 리뷰’는 2017을 장식할 10대 혁신 기술로

 ‘실용적 양자 컴퓨터’를 포함시킨 바 있습니다. 그동안 개발 중이던 양자컴퓨터가

올해부터 현실에 적용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양자컴퓨터란 양자역학 원리에 따라 작동되는 미래형 첨단 컴퓨터를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양자컴퓨터가 양자역학적 특징을 살려 병렬처리가 가능해지면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선보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양자컴퓨터는 이진법(binary bit)을 사용하는 기존 컴퓨터와는 달리 큐비트(qubit : quantum bit)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진법은 0과 1의 오직 두 숫자만 사용하는 계산법입니다.

 10 대신 2를 기본단위로 해 0+1이 되면 10으로 올라갑니다.


반면 큐비트는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00, 01, 10, 11 등 4가지 상태를 기본 단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2개의 큐비트라면 4가지 상태(00, 01, 10, 11)를 중첩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 n개의 큐비트라면 2의 n제곱만큼 중첩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연산을 해나갈 경우

이진법과 비교가 안될 만큼 빠르게 일을 처리해나갈 수 있습니다.

큐비트가 512개라면 2의 512제곱 배 빠른 속도로 연산이 가능합니다.

 

만약 암호 해독 용도로도 활용 가능한 양자컴퓨터가 구글의 전략대로 개발이 된다면

 기존 암호 체계는 붕괴될 수밖에 없게 된다. 굳이 메신저 업체에 협조를 구하지 않더라도

암호화한 개인키를 해독함으로써 실질적인 감청이 가능해질 수 있다.

특히 양자컴퓨팅 기술이 미국 등 정부에 의해 개발이 완료되면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감시체계의 작동이 이론상으로는 현실이 될 수 있다.

 

 

 

 

 

 

 

획기적인 인공지능의 출현

 

 

구글은 지난해 초전도 회로를 이용한 9큐비트 양자컴퓨터에 이어 올해 49큐비트 양자컴퓨터를 내놓을 계획이다.
 

암호 분야 외 구글이 탐내는 영역은 인공지능 분야다. 레이 커즈와일이 주창하고 있는 특이점, 다시 말해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능가하는 시점이 도래하려면 양자컴퓨터의 개발이 필수적이다.

특히 뇌과학과 양자컴퓨팅이 결합하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인공지능의 탄생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구글은 양자컴퓨터를 딥러닝과 같은 머신러닝 기술에 응용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구글은 인공지능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기업 가운데 한 곳이다. 구글 자율주행차를 비롯해 검색 등에 구글은

인공지능 기술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시 도로 위에 존재하는 모든 차량의 움직임을 기계학습을 통해 분석한 뒤 향후 교통흐름을

예측한다고 가정해보자. 기존 컴퓨터로는 수십 수백만 대에 달하는 개별 차량의 움직임을 학습한 뒤 예측하려면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양자컴퓨팅은 이러한 문제를 단숨에 풀어줄 수 있다. 구글 자율주행차의 사고 없는 운행도

 양자컴퓨팅의 도움으로 실질적 개선을 이뤄낼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양자학습이 머신러닝의 학습 성능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를 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특히 작업이 복잡해질수록 양자 효과에 의한 학습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수 있다.

 영화 ‘트랜센더스’의 양자컴퓨터처럼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학습해 환경에 대응하는 인공지능의

 탄생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자학습은 양자 원리를 활용한 알고리즘의 개발을 요구한다.

양자 알고리즘을 고안하지 못하면 양자컴퓨터는 무용지물이다. 구글이 머신러닝 분야에

양자컴퓨터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양자학습 알고리즘을 개발해내야 하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나는 원자 하나에 디지털 신호를 담는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의 새로운 상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네이처는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IBS 양자나노과학연구단장(이화여대 물리학과 석좌교수)이

원자 하나하나에 1비트의 정보를 안정적으로 기록하고 읽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데 실리콘 반도체 대신 원자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실리콘 반도체는 트랜지스터 크기를 줄여가면서 저장용량을 늘리고 처리속도를 높여 왔지만 한계에 이른 상황이다. 현재 10nm(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이 개발됐지만, 작은 간격으로 회로를 설계하면 터널링 현상으로 인한

 간섭이 발생해 더 이상 회로를 고도화해 성능을 높이는 것이 힘들다.

 연구팀은 홀뮴(Ho) 원자 한 개로 1비트를 읽고 쓰는데 성공했다.

홀뮴으로 USB를 만들면 영화 50만편 저장이 가능하다.

 

 

 

 

 

네이처는 또 표지논문을 통해 “한국인 과학자들이 ‘시간 결정’(結晶)을 구현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시간 결정은 물질의 특수한 상태로 지금까지 이론으로만 존재하다가 이번에 처음 실험으로 구현했다.

시간 결정은 물질이 공간이나 시간에 따라 불변인 형태를 갖고 있다는 ‘대칭’ 이론을 깨는 것으로

 향후 양자 컴퓨팅 개발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양자역학에 대해 아는 서양 학자들 중에는 동양사상,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사상과

 양자역학 이론이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다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요.

 


저 아래 소개한 기사의 내용인즉, 한 쌍을 이루는 두 소립자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마치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한 쪽에 변화가 일어나면 다른 쪽에서도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즉, 한 쌍을 이루는 두 소립자가 거리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치

쌍둥이들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우주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갈파해오고 있지요.

 그것을 일컬어 소위 "연기론"(緣起論)이라고 하지요.

게다가 모든 하나의 조그만 미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이미 우주 전체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갈파하기도 하지요. 즉, 우주만물 삼라만상이 우주 전체 아닌 것이 없다는 의미죠.

 


즉, 개별적 인간들 자체가 각각 서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 인간들 자체가 전체 우주와 똑같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상이지요.

 

 

 

 

 

 

 

 


緣起란 어떤 것인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연기라고 한다면 연기법의내용은

과연 어떤 것인가?

 

차유고 피유 차기고 피기 차멸고 피멸

[此有故 彼有 此起故彼起 此滅故 彼滅]의 법칙을 말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 것도 있고 ,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 것도

일어나며, 이것이 멸하므로 저 겻도 멸하는 것이다. 란 말이다.

 

삼법인에서 제법은 무아 [諸法은 無我]라고 하였다.

소위 "텔레파시" 이론도 사실일 가능성이 크고,

나아가 소위 "천리안 천리통"(千里眼 千里通)이라는 신통력과 비슷한 

 

 

 

"육신통"

 

 

 


1. 육신통의 종류

 


천안통(天眼通) :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이통(天耳通) : 보통 들을 수 없는 먼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타심통(他心通) :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숙명통(宿命通) : 자기와 타인의 전생을 알 수 있다.

신족통(神足通) : 어느 장소로나 임의대로 나타나고 날아갈 수 있다.[2]

누진통(漏盡通) :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다.

 


석가모니는 생전에 이 6가지 신통력 중, 숙명통(宿命通)과 누진통(漏盡通)을 가장 높이 평가했으며,

이 두 가지 중에서는 누진통을 더 높은 수준으로 보았다고 한다.

 누진통을 얻을 경우 곧 깨달음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

 

 

 

 

 

 

 

 

 

 


두 개의 서로 각기다른 곳에 존재하는 양자는 "동시"에 존재한다.

요약 멀리 떨어진 두 개체가 즉각적으로 서로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

1964년 존 스튜어트 벨이 발표했다. 양자이론 가운데 기이한 특성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네덜란드 로날드 헨슨 연구팀이 주도한 국제연구팀이

양자얽힘 현상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한 번 짝을 이룬 두 입자들은 아무리 서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어느 한 쪽이 변동하면

그에 따라 ‘즉각’ 다른 한 쪽이 반응을 보이는 불가사의한 특성을 가지는 데,

양자이론에서는 이 두 입자가 서로 ‘얽혀있다’고 하며 이를 일컬어 ‘양자얽힘’이라고 한다.

 1964년 아일랜드의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John Stewart Bell)이 이론으로 발표했다.

 

가령 한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 스핀과 같은 특성을 측정한 순간, 이들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 입자의 해당 특성이 ‘즉시’ 바뀌어 입자의 상태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입자가 오직 즉각적인 주위 환경에만 직접 영향을 받는다는 표준 물리학의 ‘국소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때문에 이 이론은 물리학적 연구가 아니라 철학적 연구라고 여겨졌다.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도 우주에서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이론을 “유령 같은 원격작용”이라며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5년 10월 <네이처>지논문을 통해 ‘양자얽힘’이 실재한다는 강력한 증거를 보여주는 실험결과가 알려졌다.

이 실험은 네덜란드 델프트 공과대학 카블리 나노과학연구소의 물리학자 로날드 핸슨(Ronald Hanson)의

 연구팀이 주도했고 스페인과 영국의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연구팀은 델프트 대학 캠퍼스 내부 1.3km 떨어진 거리에 두 개의 다이아몬드를 배치하고 각각의 다이아몬드 전자에 자기적 속성인 ‘스핀’을 갖도록 했다. 실험결과는 한 전자가 업 스핀(예를 들어 반시계 방향으로의 회전)일 경우,

다른 전자는 반드시 다운 스핀(시계 방향의 회전)이 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완벽한 상관관계를 입증했다.

물리학자들은 이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 실험이 실제로 가능함을 증명했다는 점에 찬사를 보냈고,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지는 이 실험을 2015년 최고의 과학적 성과 중의 하나로 선정했다.

 

 

 

 

 


이 반직관적인 양자 얽힘 현상은 기왕의 철학에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현상이 알려주는 바는 우주가 국지적이 아니라, 비국지적이라는 사실이다.

공간이란 사물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처럼 보여주는 관념일 뿐, 실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빅뱅에서 출발한 우주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양자얽힘을 빅뱅의 순간까지 소급해 들어가면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하나에서 시작해서...

서로 비국소적으로 얽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을 초월하고...

빛이 모든 물리량의 극한이라고 주장한 그의 이론인 특수상대성이론을 부정하는 결과죠...

쉽게말해서...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파동으로 서로 얽히고 섞여 있다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그것은 우리의 관찰력 기술의 부족으로 인한것이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물리량이 존재한다라고 양자이론을 부정했었는데...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측정기술이 점차적으로 발전함에따라 적어도 아원자 세계에서는

양자이론이 맞아 떨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양자이론은 파동이론이라고 했죠..

우리가 상상하는 고립된 알갱이?의 최소단위의 물질은 이 우주 어디에도 없습니다...

서로 얽히고 얽혀 서로 물질적인 영향을 주기도하고 정보도 주고받고 하는것이죠...

우리가 관찰되는 소립자의 물질이라는 것도 결국, wave packet입니다...

파동의 중첩이 많이 되면 될수록 입자의 성격을 띄는것이지...

그것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죠...

 

인식에 대해...

 우리의 인식이란것도 양자적 작용의 결과....

나 한사람의 인식은 곧 주위의 다른 사람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칠까요 안미칠까요? 단, 정보전달의 다른 변수를 제거하고서 말이죠...

 

양자이론으로 본다면...미칠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입니다...

이는 파동의 얽힘이 확률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다수의 사람의 인식에서   어떤 집단이나 사회 국가의 사람들이

 동시에 하는 인식은 어떨까요? ....... ( '집단지성' 내지  '시대정신' 같은거....)

아무래도 확률이 매우 상승하니 영향을 미칠 확률도 더욱 크다...

 

보이지 않는 인식의 상호작용...이것을 가리켜 흔히들 텔라파시라고 하죠...

누군가에 대한 저주........확률적으로 저주의 대상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이라면 더더욱이 영향을 줄 확률이 올라가겠죠...

그러니 사람은 남한테 상처 안주고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인식이라는 것도 파동의 작용이기때문에 물질파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관찰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게 아니죠!!

파동은 곧 정보저장고 입니다...

 

가장 파동에너지 저장을 잘하는 물질이 "물"이죠...물은 파동의 왜곡없이 그대로 보존하는 저장고입니다...

동양철학의 주역에서도 모든 우주의 근원이 水라고 한 이유도 그때문이죠...

 

 

 

 

 

아무튼 파동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신비로운 존재입니다...물질의 근원이기도 하고 말이죠...

문제는 이 양자얽힘의 세계가 시공간을 초월한다는데 있습니다...

 

하나의 변화는 다른 하나 혹은 여러 파동의 변화에 동시에 작용한다는 것이죠...

이 우주가 무한하고 여기에 존재하는 행성의 물질파들이 떨어져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게 하나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확률적으로 말이죠...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시간의 기준이되는 빛의 속도를 초월하는 것이고...(빛보다 빠르단 얘기가 아님 !)

이는 곧 지금 이순간 과거의 파동과 현재의 파동 미래의 파동 또한 서로 얽혀서 정보를 주고 받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인식의 변화입니다...

현재는 미래를 바꿀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바꿀수도 있는것이죠...

 파동의 변화를 분석할 기술만 존재한다면...미래의 일을 예측한다거나 과거의 역사를 바꾸는 것은

식은 죽먹기겠죠...

간혹 인간의 뇌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경우를 우리는 보기도 합니다...선몽을 통해서 말이죠...

여기서 다중우주론이 나왔는데...그것은 우주를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모습에서 기준한 것이기 때문에

맞지않는다고 보고...

그냥...이 우주는 항상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서...

그 절대적인 형체가 없다라고 표현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죠...

 

정리하면...

파동은 물질을 구성할뿐만아니라 정보와 에너지를 저장하고 서로 전달하는..

시공간을 초월한 물리량이다...


이것이 응집된 블랙홀같은 경우는 어떨까요?

이곳은 어떤 행성이 생성되고 폐기될때까지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영화 인터스텔라에 보면...주인공이 블랙홀에 빨려들어가 과거의 모든 정보가 공존한 공간에서

그가 의도한 시점을 보게되죠...

 

 

 

 

 

 

1983년 이론가 돈 페이지(Don Page)와 윌리엄 우터스(William Wootters)는

양자 얽힘이 휠러-드위트 방정식의 시간문제를 풀어줄 지도 모른다고 제시했다.

휠러-드위트(Wheeler-DeWitt) 방정식 같은 경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양자화하려고 시도했는데,

이 이론에서는 시간을 전적으로 무시한다.

 

 양자들이 서로 얽힘 상태가 되면, 어느 한 쪽의 성질을 측정하면 그로 인하여 나머지 한 쪽의 상태가 변하게 된다. 그들은 우주 밖 모든 것과 양자 얽힘 상태에 있는 시계가 하나 있음을 가정한 다음, 그런 시계가 있다면

 같은 우주에 사는 관찰자에게 그 시계가 보통처럼 째깍하고 가는 것이 보이겠지만,

 그러나 만일 우주 밖에 사는 가상의 관찰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시계를 포함한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정지한 상태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시간은 환상이다. 적어도 두 개의 빛 입자로 만들어진  우주 모델에서는 그렇다. 실험에 의하면 우리가

시간이 경과했다고 인지하는 것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는 기묘한 특성에서 나온 것일지 모른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면 오랜 숙원이던 현대 물리학을 통합하는 방법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양자물리학에 양자수프(quantum soup)라는 것이 있는데,

즉 우주는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의 양자수프의 상태로 있다가

사람들이 의도하고 원력을 세우는 순간

그 무한한 가능성 중에 하나를 현실로 만들어낸다.

 

양자수프는 불교의 공성(空性)과도 같이,텅 비어 있지만

그 속에 무한한 가능성의 현실이 갖추어져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은 때때로 기적적인 치유를 가능하게도 하는데,

이를 '양자도약'이라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하나의 우주에서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존재하다가

때때로 다른 가능성으로 양자도약을 한다고 한다.
양자도약이 가능한 것은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는

신비한 연결성 때문인데, 양자물리학에서는 입자들이 아무리 먼 거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초공간성, 비국소성) 서로 연결된 것처럼 행동하는 신비로운 연결성, 연기성을 발견했고,

 이를 양자 얽힘이라고 부른다.

 

파동은 곧 입자와 다르지 않은데,

우리가 원력을 세울 때 그 원력의 파동이

초공간성으로 연결된 이 우주법계 곳곳에까지 연결되어 힘이 미치게 되고,

비슷한 파동으로 진동하는 것들을 끌어당겨 공명의 법칙으로 서로 감응하게 함으로써

저주나  기도가 이루어지는 물질현실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다."

 

 

 

 

 

 

<법상 합장>

.....................................................................................................

모든 물질이 실상 다 공(空)으로 채워진...
입자이며,파장이기도 한...

파장이나 입자의 성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누군가가 보고 있으면 입자를 선택하는..
보지 않으면 언제나 파동을 선택하는...

관찰자가 없으면 전자는 잠재성으로만 존재하는...
살아 있는 관찰자,생명체가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실재하는 세상에 입자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물이 우리가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생각하거나 보는 바에 따라...

그러니까...
이리 보면 이게 현실이고,
저리 보면 저게 현실이 되는...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은...
우리가 만든 것이고,
우리 의식의 반영이기도 한...

일반의 철학적 성찰이 양자 물리학의 소견과 같은...
사물들은 “형체 없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양자 스프”로 존재하는...
그러다 재빨리 고개 돌려 쳐다보면,
순식간에 아무 이상 없는 물리적 실체로 돌아오는....

.........................................................................................................


 

 


 

 

 

 

사랑의 양자물리학 -  양자수프(Quntum Soup)와 우주수프(Universe Soup)

물질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원자개념이다.
원자가 만일 한 알의 사과정도 크기라면, 전자는 얼마큼 떨어져 그 주위를 돌까.
10km정도나 된단다.


하면, 그 사이는 텅 비워져있는 공간이니,
우리 몸도 대부분을 빈공간이 차지하는 것 아닌가.

아니, 모든 물질이 실상 다 공(空)으로 채워진 것 아닌가.


또 원자핵 둘레를 도는 전자의 성질에 대해서다.
전자가 입자이며,파장이기도 하다는 소리는 대충 배워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게 동시적으로 그런 성질을 띠는 줄 알았는데, 오해였다.
전자는 파장이나 입자의 성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거다.
곧 누군가가 보고 있으면 입자를 선택하고,
보지 않으면 언제나 파동을 선택한다는 것이 오래 전에 연구로 밝혀졌단다.

다시 말해, 관찰자가 없으면 전자는 잠재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다 누군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실재하는 세상에 입자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해서 많은 물리학자들은 모든 사물이 우리가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로 변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단다.
흥미롭지 않은가.


현실이 현실인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거나 보는 바에 따라,

그러니까 이리 보면 이게 현실이고, 저리 보면 저게 현실이 되는 거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한ㅇ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은 우리가 만든 것이고,우리 의식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초미세의 이런 물리학적 현상은 우리 현실계에서 목격담으로도 알 수가 있다고 하는데, 예컨대 이런 거다.

 

1930년대 영국에서는 새 몇 마리가, 우유 배달부가 배달해 놓은 우유병에서 뚜껑 여는 법을 알아냈다.
그 직후 유럽 전역의 새들이 갑자기 우유병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전달된 속도를 생각하면,

 새 한 마리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리란 가정은 전혀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들은 참새도 아니고, 체구도 참새보다 작아서 영국 해협을 건넜을 가능성이 전무했다.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의 저자, 톰 하트만은 그의 책에서 루퍼트 쉘드레이크가

그 같은 동물들의 거리 초월성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인용했다.
멀리 떨어진 지식을 즉시 공유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을 쉘드레이크는

형태 공명(Morphic Resonance)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역시 이는 인간도
아인슈타인이나 보어가 입자의 특성을 설명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이러한 양자 물리학적 내용들을 여기에 다시 인용을 하는 것은 무엇을 새로이 느껴서인가?
새로운 양자 물리학은 요컨대,우주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의식이고

,이 의식은 거리에 제한받지 않는다는 종지를 알게 돼서일 것이다.

이런 사실의 앎은 또 우리에게 요즘 발전을 더 하고 있는 뇌 과학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던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예컨대 요즘 뇌 과학의 설명에 따르면,마음은 뇌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하고,

 마음이란 감각, 지각 등 육체적 속성의 반영일 뿐이고,의식이란 것도

 인간에게 감각적 속성이 없다면 있기 어려웠을 거란 견해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법 하다.

 

또한 의식이 있음으로 해서 심신의 통합적 기능이나 생명 유지가 가능해 짐은 자명하다할 것이다.

뇌의 부위별 기능, 여러 부위별 네트워크의 기능에 점차 과학적 규명을 더해감에 따라,

 뇌질환이나 뇌기능의 미묘한 특성에 대해서도 이해가 한층 더 높아졌음 또한 잘 알려진 바다.

하나 앞으로 기능성 MRI, PET등 첨단 의료 장비가 더 발전된 형태로 개발된다하더라도,

이 ‘의식’의 문제는 그리 쉽게 해결될 전망이 아니란 생각이다.

 

형태 공명이나 거리 초월성의 문제, 의식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은 물론 우주의 본질적 속성에 까지

부합될 수 있을 만큼 설득을 가지려면, 다른 식의 이해나 접근이 앞으로 더욱 더 보완돼야 하지 않나 싶다.

예컨대 이런 생각의 상정에서다.

사람이 죽으면, 의학적으로 의식은 없어진다고 본다.
외형상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하나 과연 완전히 그 의식 자체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양자 물리학적 소견에 의하면,의식은 죽은 뒤에도 소위 ‘우주 스프’안에 녹아들어 가는 것 아닌가.
일본의 선사 다이닌 가타기리는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은 영(零)이 됩니다.
침묵의 세계로 되돌아 갈 때, 모든 것은 비인간적(not-personal)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설명 같다.

또 우리의 개인적 의식 너머에, 우리의 본래 모습이 있는데, 불교에선 이것을

 ‘우리의 부모가 태어나기에 앞서 있던 나(父母未生前本來面目)’ 또는

 ‘한 생각도 생겨나기 이전의 나(一念未生之前本來面目)’
이것들은 선가(禪家)에서의 공안(公案)이기도 하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 '우주 스프'와 선가에서 말하는 보편적 '나'와는 같은 의미로 봐도 틀리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주스프는 우주의식의 다른 표현이라 볼 때 그렇다는 뜻이다.
가능한가?


이슬람교에서 신비주의 분파로 여겨지는 수피교에서는 불교에서처럼 환생을 받아들인단다.

여기서 어느 수사는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의 생각, 경험 등이 모두 우주의 스프 냄비 속으로 들어가

 ‘모든 사람이 함께 섞이는 거대한 우주 잡탕’이 만들어 진단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때면,‘우주 요리사’가 국자를 들고, 이 스프 냄비에서 인간의 몸과 영혼을

충분히 채울 만큼의 국을 떠서,새로 태어날 아기에게 부어넣는다고 설명한다.

 

보편적 의식(우주의식)이 개인적 의식으로 나누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자 물리학적 개념을 적용시키면,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이는 개념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상상의 비약인가?
비가시적인 일이지만 그럴 듯해 보인다.
뭐, 달리 생각해도 상관은 없을 터다.


다만 양자 물리학은 우리에게 최소한 이런 메시지만은 남기는 것 같다.

평소 우리가 하는 일상의 행동이나 사고 하나하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다른 인간들에게 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그리 보면 동서양의 오랜 지혜들, 말하자면 예부터 공자 왈, 맹자 왈,

수시로 자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소리나 부처님이 강조한 선행이나 자비실천, 생명존중의 사상,

 예수의 사랑 실천 같은 것들이 의미 있는 소식으로 와 닿는 것이다.

기도도 효력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모두는 그 마음이 모든 실체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면 분명 이 세상을 바꾸는데 있어 얼마나 강력한 힘이 발휘될 수 있는지를, 양자 물리학은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힘의 영향은 물론 자신의 자유 의지로 말미암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일 테고,

그로 인해 남에게도 동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교훈이다.

요컨대 현대의 양자 물리학은 우리에게 사랑의 물리학을 가르쳐 준 셈이고,

우리가 ‘왜 사랑해야 하나’, 그 이유도 과학적으로 설명해줬다고 해석되는 바다.

 

 

주역(周易)에 이런 말이 있다,


君子居其室 出其言善 則千里之外應之 況其邇者乎
즉 "집안에 있으면서도 하는 말이 선하면 천리 밖 먼 곳에서도 뜻을 함께 한다"


이 말은 과학적으로 즉 양자 물리학의 시공간의 초월성(시공간초월현상)에 대입하면 정확히 들어 맞는 말이된다.
하물며 가까운 곳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는 말이 선하지 못하면 천리 밖 먼 곳의 사람들도 떠난다.
하물며 가까운 곳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집착하면 오히려 ....거꾸로 이루어지기 쉽다.

집착하는 마음 이면에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불안과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게 되면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이루어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마음 속에 연습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만물 속에 우주 끝까지 자신의 신호를 발산하는 에너지를 '장착해'놨어.

사람, 동물, 식물, 바위, 나무, 즉 모든 물체들이 무선송신기처럼 에너지를 내보낸다!
  
너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네 중심부로부터 사방팔방으로 에너지를 내보내고-발산하고-있어.

너 자신인 이 에너지는 물결 모양을 이루며 밖으로 퍼져나간다.

그 에너지는 너를 떠나 벽을 뚫고 산을 넘고 달을 지나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아.

 

네가 지금껏 가졌던 모든 생각들이 이 에너지를 색색이 물들이지.

(네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 만일 그 사람이 충분히 예민하다면, 그는 그걸 느낄 수 있어.)

 네가 지금껏 뱉어낸 모든 말들이 그 에너지를 형성해. 네가 지금껏 행한 모든 행동들이 그 에너지에 영향을 미쳐.

네가 발산하는 에너지의 진동과 속도, 파장의 길이와 진동수는 네 생각, 기분, 느낌과 말과 행동에 따라

항상 바뀌고 변한다.

 

"좋은 진동 내보내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거야. 그건 맞는 말이야. 아주 정확해!

그리고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같은 일을 하고 있지. 그래서 너희들 사이의 "허공"인 에테르는

 에너지로 채워져 있어.
  
허공은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복잡한 융단무늬를 형성하는 얽히고 얽힌

 개개 "진동들"의 바탕 망(Matrix)이야.
이 직물이 너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결합된 에너지 장이야.

그것은 강력해서, 너희를 비롯해서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가 영향받는 유입 진동들의 임팩트를 받아서 새로 창조된 "진동들"을 발산하지.

그리고 이 진동들은 다시 그 바탕 망 속에 보태져 바탕 망을 변화시키지. 그러면 바탕 망은 다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에너지 장에 영향을 미쳐 그들이 내보내는 진동에 영향을 주고,

 그게 그 바탕 망에 영향을 주고, 그게 다시 너희에게 영향을 주고... 그렇게 계속.

 

 

 

너희는 이것이 순전히 그냥 팬시한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공기가 너무 두꺼워서 칼로 자를 수도 있는" 방에 들어가 본 적 있나?

아니면 같은 시기에 같은 문제를 연구하는 두 과학자 이야기는?
지구의 정반대쪽에서 상대방을 전혀 모르고 연구했는데, 갑자기 똑같은 해결책을

동시에, 독립적으로 얻게 되는 두 과학자 이야기 말이야.
  
이런 일들은 흔해. '바탕 망'이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들 중 하나지.

그때그때에 따라 범위를 달리하는 '현재의 총 에너지 장'인 '바탕 망'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진동이야.

 그건 물체와 사건에 직접 충격을 주고,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창조할 수 있어.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마태복음 18장 20절])

 

너희의 인기있는 심리학은 이 에너지 바탕을 "집단의식"이라고 부르지.
그건 너희 행성 위의 모든 것, 전쟁의 전망과 평화의 가능성, 지구 차원의 재난이나 행성의 평온, 질병의 확산이나 세계 복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실제로 미치고 있고. 그 모든 것이 의식(consciousness)의 결과야.

너희 개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더 구체적인 사건들과 상태들 역시 마찬가지고.

 


요즘엔 티비 씨에프에서도 '진리'를 담고 있는 명제가 광고 카피로 무심코 전파를 탄다.

ㅡ "생각이 에너지다."


모르겠다, 위 카피는 혹

 '머릴 잘 쓰면 석유 없이도 문명을 영위하고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얄팍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을 뿐인 건지도.

 하지만, 생각은 에너지 맞다.

 

생각이 에너지라 함은, 너무도 미묘하고 시시각각 여여한대로 천변만화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기술적으로 측정되기 힘들지만, ‘생각’이, 생각이 일으키는 파동이

일정한 에너지 준위와 물리력(힘)을 갖고 물체 등의 현실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돌은 '죽어 있는' 거라는 우리의 일상적 인식은 그러나 바위인 채로 무수한 각 원자핵의 주위를 맹렬히 돌고 있는

더 무수한 전자들의 원운동에 대해서 무언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돌들이 '치유' 작용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거기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는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것도 파동간의 공명, 간섭, 상쇄작용의 결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에너지로부터 물질에 이르는 길은 우리 인식 속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건 아마도 진동수의 크기의 문제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

 

 

 

'물체와 사건' 모두를 위에서처럼 파악하는 것은

 

만사가 '오온의 가합'이라고 본 불교적 인식론과 같은 것이다


3연딸을 치니 여자따위는 마구니로 보이는군아 ...

 

너희들의 엉킨 핏줄과 근골은


" 사대와 오온의 가합일 뿐 ."

 


어찌 내 범부들과 같이 욕심을 내리오?


채색한 항아리 속의 독사들이여


똥찌꺼기 가득 찬 가죽주머니에 불과한 그대들이여

 


어찌 세간을 벗어난 나를 잡으려 하느뇨


나는 공중을 자유로히 나는 바람과 같으니


그대들의 애욕으로는 영원히 날 묶어두지 못하리

 

 

 

 

 

 

 

존재하는가?

 

 

자유의지 ...  자위 의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론(無我論)은.... 실체적 자아는 없으며 오직 연기하는 자아만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붓다가 활동하던 당시 인도 전통 철학에서는 아트만이라는 자아 개념을 상정하고

이 아트만이 생(生)에서 다음 생(生)으로 유전하는 윤회(輪回)의 주체가 된다고 믿었다.

 인도 사상과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는 윤회를 영혼이 윤회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에 윤회에 대해 언급하는 고대 그리스의 영혼 개념과 인도 전통 사상에서의 아트만 개념을

모두 실체론적 자아로 파악하고, 실체론적 자아는 무명에서 비롯된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아가 무아(無我)이고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착각이라면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가 가능한지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윤회는 초기 불교가 언급하지 않은 외래 사상이며

또한 붓다가 방편설로 취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석

가모니의 교설 중 상당 부분에서 윤회를 전제로 한 업설(業說)과 12연기(緣起)를 해설할 때

윤회를 전제로 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불교가 윤회를 방편설로 취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자아가 불교가 주장하는대로 무아라면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변화한다는 윤회설과

 어떻게 양립하는지 여부가 불교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어 온 것이다.

  본고(本考)에서는 불교의 무아론을 살펴보고 무아론과 윤회가 어떻게 양립가능한지 살펴보겠다.

 


무아론

 


내가 나임을 인지하는 자아는 常住하는 것이며 육체의 생명이 다할 때 이 자아라는 것은 영혼으로 불리워지며

이 영혼이 보다 좋은 곳(천국이나 천상)이나 나쁜 곳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와 세계 각국의 내세관(來世觀)이다.

 내세 관념이 생을 영위하는 인간이 죽은 다음에 다른 존재로의 이행이라면

인간으로의 환생과 다른 존재로의 환생을 인정하는 인도 사상 역시 같은 부류에 속한 것이다.

 즉 윤회론을 넓게 해석하면 죽음 이후에 존재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내세 관념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인간으로의 환생 역시 이러한 내세관념의 연장인 것이다.

 

이들 내세관념에서는 인간의 다른 존재로의 이행에 자아가 윤회한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인도 고전[바가바드 기타]의 어떤 판본에서는 어린아이-장년-노년-백골-어린아이 등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파노라마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각 단계를 연속적으로 관통하는 아트만이 그려져 있다.

아트만 즉 자아는 동일성을 가지고 윤회한다는 것이다. 윤회 관념은 이렇게 해석되어져 왔으나

 불교는 윤회의 주체인 자아는 실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불교적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자아라고 인식하는 것은 다양한 조건들이 상호 연관성을 가지면서

자아라고 불리우는 현상은 있으나 자아라고 불리우는 실체는 없다고 한다.

이 조건들은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이며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역시 원자론과 흡사한 고정된 구성요소가 아니며 가변적인 현상을 개념화한 것이다.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五蘊)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이다.

 온이란 곧 집합 ·구성 요소를 의미한다.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를 의미하는 경우에는

‘색’은 물질요소로서의 육체를 가리키며, ‘수’는 감정·감각과 같은 고통·쾌락의 감수(感受)작용,

 ‘상’은 심상(心像)을 취하는 취상작용으로서 표상 ·개념 등의 작용을 의미한다.

 ‘행’은 수·상·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의지작용·잠재적 형성력을 의미한다. ‘식’은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이들 오온은 연기적으로 결합하여 자아라고 인지되는 현상을 창출한다.

 이 자아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결합된 즉 가합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조건들을 다시 찾게 된다고 한다.

 

오온으로 가합된 존재는 다시 오온을 찾아 ‘나의 것 만들기’와 ‘나 만들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태어남의 조건을 언급하면서 석가는 이러한 생겨남의 조건에 있으면서

또한 똑같이 생겨남의 조건을 구한다고 말한 것이다.

존재로 규정된 존재는 다시 그 존재 근거를 찾아 존재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오온이라는 조건은 행위에 의하여 취사선택되어 자아를 이룬다.

이러한 행위에 의하여 취사선택된 오온으로부터 자아의 내용은 실체적으로 고정적으로 규정될 수 없으나

행위가 누적되어 하나의 경향성을 띄게 될 때 자아의 존재형식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한다는 말이 성립되게 된다. 

이를 업이라고 말하며 오온의 행(行)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다. 둘다 행위하다라는 어원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오온의 행은 업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성향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보면 된다.

 

업은 그 내용에 따라 윤회를 유도하는 악업(惡業)과

 윤회를 차단하고 12연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선업(善業)으로 나뉘어진다.

선업은 악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쓰이긴 하지만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선업이 이루어지는 배경인  " 탐진치(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의  지멸(止滅)"에 도달하기 위하여

선업을 행한다는 것이다.

 

자아가 조건이 연기적으로 결합된 무아(無我)이고

행위의 흐름이 자아를 규정한다면 이러한 행위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경향성으로서의 자아 관념을 도출하게 된다.

이 상태의 자아는 (고정적이고  실체적인 영구불변의 자아가 아닌) 경향성으로서의 자아가 된다.

 

경향성으로서의 자아는 자아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건들 역시 고정되어 결합된 것이 아니며 찰나적으로 명멸(明滅)하며 가합으로서 자아를 구성하는 것이기에

 시간적으로 앞의 자아는 뒤의 자아와 같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앞 존재의 성향이 뒤의 존재의 성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유사성을 가지고 연속된다.

 자아의 구성요소들이 생멸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시간적으로 앞의 자아와 뒤의 자아가 연속성을 가지게 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의문은 앞에서 확인한 존재는 다시 그 존재 근거를 찾고, 생겨남은 다시 생겨남의 조건을 찾는다는

석가모니의 교설에서 해소될 수 있다.

생겨남은 생겨남의 조건을 찾는다는 교설은 하나의 경향성으로 해석될 수 있을 터인데,

자아의 구성요소 역시 동류의 구성요소를 찾기에 비록 생멸하는 구성 요소들이지만

경향성에 의하여 유사한 것들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윤회는 무아론과 양립가능한가?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했다.

 


“중생은 행위의 소유자이며, 행위의 상속자이며, 행위로부터 태어난 자이며(행위의 모태이며),

행위를 친척으로 하며, 행위를 의지처로 한다. 중생을 열등하게도 하고 탁월하게도 하는 구별을

생기게 하는 것은 업이다.”

 


석가모니의 이 교설은 행위가 누적되어 경향성을 이루고 이 경향성이 실체적인 자아가 아닌

자아의 형식으로서 자아를 규정한다면 자아의 윤회는 업의 윤회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도 업이 이전하는 것으로 보면 석가모니의 교설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실체로서의 업의 유전은 불교가 경계하는 실체론적 아트만 윤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음을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업은 경향성으로 인지되어 한다.

윤회는 행위의 습관과 그 결과로서의 성향인 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업의 선악에 따라 자신의 존재상태를 규정받고 규정해가는 존재인 것이다.

선한 행위는 자아를 선한 존재 상태로 규정하며, 악한 행위는 자아를 나쁜 존재 상태로 규정한다.

 이러한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명제는 윤회에서 적용될 때 자아가 죽음을 맞이할 때

다음 존재가 겪을 결과로서 적용되는 것이다.

 

 석가는 개, 소를 흉내내어 고행하는 수행자인 푼냐와 세니야에게

 개의 행위는 죽음 이후에 개로, 소의 행위는 소로 죽음 이후에 소로 귀결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어떤 범주의 중생이 되느냐의 여부는 존재가 어떻게 행위해 왔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석가의 이 교설은

경향성으로서의 업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즉 자아는 무아(無我)이며 자아라는 불리는 현상은 존재하지만

고정적 실체로서의 자아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고정적으로 보이는 자아는 오온의 가합이며 업의 자아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14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는데,

 이 질문들 중에는 아트만의 실존 여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석가모니가 아트만의 실존 여부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은 것은

아트만이 있다고 하면 실체론에 빠지게 되고

아트만이 없다고 하면 업으로서의 자아, 행위로서의 자아, 가합된 자아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윤회는 12연기에 따르면 존재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12연기의 과정을 밟아가며 발생한다.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윤회는 존재가 12연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때, 오온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무명 이전으로 회귀하지 못하는 이상 끝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의 자아 개념과 윤회론과 수행론은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현상으로서의 자아는 윤회하지만

윤회는 자아가 고정적이다는 자기 인식으로 인한 것이라

수행으로 무아론을 증득하여 윤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불교에서의 자아에 대한 이론과 윤회의 상관성이다.

 

윤회는 자아가 독립되고 실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며

불교의 무아론을 정확히 이해하게 되면

윤회는 무아윤회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한다는 것과 윤회하는 존재가 무아라는 이야기는 의미는 같지만,

 윤회의 이해에 큰 차이를 낳게 된다.

 

무아론과 윤회설이 양립불가라는 논쟁은

무아론을 윤회하는 존재가 무아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초기 불교는 무아론과 윤회의 양립 가능성에 대해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윤회하는 존재가 무아라고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아인 존재가 윤회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여진다.

 

 

 

 

 

 

 


무아론에 초점을 맞추어 윤회를 이해했다면

불교내에서 수많은 논쟁을 일으켜왔던 윤회와 무아론의 양립 불가능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본다.

 

무아를 이해할 때 언급되는 12연기와 오온 그리고 업의 개념을 이해하면

윤회는 업의 실체적 흐름이 아닌 경향성으로서의 업의 윤회로 이해되게 된다.

 

불교에서 무아론과 윤회론과 수행론은 서로 엮이는 관계이며

 

무아이지만 무명 때문에 무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윤회하고

 

무아임을 인식하기 위하여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에

 

삼자의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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